아들이 입원한지 6일이 지났다.
차로 5분 거리에 살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시부모.
시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입원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끝내 그 값비싼 얼굴은 볼 수 없었고,
그나마 시어머니는 퇴원하기 전 날이 돼서야 병원으로 늦은 발걸음을 했다.
참으로 인색한 두 노인네다.
시어머니가 도착하고 잠시 아이 먹을 물을 뜨러 나왔는데
- 악!!!!!
갑자기 웬 나이 먹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비명소리는 우리 아들 병실 쪽에서 나는 듯했다.
화들짝 놀라 물을 뜨다 말고 병실로 달려 나오니
그 잠깐 사이 아들을 안고 나오던 시어머니가 병실 복도에 드러누워 있는 게 아닌가.
아들이 다쳤을까 소스라치게 놀라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게 한 여름 삼복더위에 누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예순 넘은 양반이 웨스턴 부츠를 신고 와서는,
아파서 골골대는 손주를 안고 돌아다니다
병원 복도 한복판에서 자빠진단 말인가.
내가 나쁜 년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꼬소하던지.
풉.
쌤통이다.
병실에 빈손으로 온 시어머니는 별말 없이 아들만 잠시 안아주다 돌아갔다.
아.
한마디 했구나.
- 아이 가지고 다투지 말자.
네가 키우겠다면 줄 거고, 못 키우겠다면 내가 키워주마
네, 어머니.
앞으로 먹고살기도 걱정스러운데 걱정을 덜어주시다니, 끝내 아들 이혼시키고 배다른 남매 키워주신다는데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라고 말했어야 했었나.
요즘은 그런 증상이 없어졌지만 이혼하고 몇 년간,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널다가도
침대에 누워 책을 몇 장 보다가도,
당시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옳은 소리를 공중에 퍼붓곤 했다.
남이 보면 조현병 환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목청을 높여 울부짖어댔으니.
그렇게 입원 일주일째가 되던 날.
아들의 담당 교수님은 이제 퇴원해도 좋겠다는 소견을 전해왔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씩 외래진료를 해야 하고
매일같이 아들에게 네블라이저를 해줘야 하며
약도 꾸준히 먹여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여서.
약을 먹고 네블라이저를 하는 것은 병원에서든
집에서든 똑같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내 집이 편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
퇴원을 하려면 수속을 밟고 짐을 챙겨 아이와 이동을 해야 하는데 아들은 이제 돌이 지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았고 컨디션이 저조해서인지 잘 걷지 못했다. 13kg 정도 됐던 아들을 안고 퇴원 준비를 하자니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다.
친정 부모님도, 가깝게 사는 시부모도
출근해있는 형제도.
남보다 먼 남편까지.
그래, 언제는 혼자가 아니었나.
나 혼자 할 수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
혼자 아이를 퇴원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 오늘 내가 갈게! 연차 냈어
지난번 남편에게 얻어맞고 도망치듯 달아나 하룻밤을 신세 진 친구였다.
그 친구 집에서 병원까지는 지하철로 2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그 귀한 연차를 나를 돕기 위해 냈다니.
그 순간만큼은 가족보다 남편보다 친구가 더 귀하고 소중했다.
멀리서 도착한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퇴원 절차를 밟고 한 끼도 먹지 못한 우리는 햄버거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입원하기 전 모습과는 어렴풋이 다른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남편 차에 붙어있어야 할 아이의 카시트는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고, 시집올 때 시부모가 주었던
십자고상과 은으로 만든 모자 상이 사라졌다.
뭐지?
짐을 내려놓으려 주방으로 가니,
식탁 위에는 협의이혼 신청서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이혼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 가닥의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갖고 있었나 보다.
그 서류를 보니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아직 이혼을 한건 아니니 이혼을 할 때까진 이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티끌만큼 작디작은 확률의 나의 바람.
하지만 식탁에 놓여있는 서류뭉치를 보니 그 티끌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져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정말 이혼을 하고 곧 이혼녀가 된다.
탕탕탕.
햄버거를 먹자는 친구의 말이 귀로만 들리고 머릿속으론 입력되지 않는다.
식욕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 배고프지? 먼저 먹어
그렇게 식탐이 있지 않은 친구였지만 배가 무척 고팠는지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내 우걱우걱 먹기 시작한다.
아이 짐을 정리하고 아들을 재운 뒤 넋이 나가 싱크대에 서있는데 입원할 줄 모르고 새벽녘 집을 나서면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여름날의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놔뒹굴고 있다.
개새끼.
나 없는 새, 협의이혼 신청서 두고 가고
지 부모가 준 십자고상이랑 모자상은 가져가면서
음식물 쓰레기 내다 버릴 생각은 전혀 못했나 보지?
음식물 쓰레기보다 네 인성이 더 쓰레기 같다.
그런 인성 쓰레기를 골라 결혼한 내 인생도 참 쓰레기 같다.
온통 더러운 쓰레기 냄새로 내 삶도 네 삶도 얼룩져있구나.
친구가 돌아가고 홀로 침대에 누워 잠든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남편이란 사람은 문자로 말했다.
- 아들 양육 문제로 이혼 안 할 생각은 마.
내가 키울 테니 9월 25일까지 집 비워줘.
전세 만기일이야.
부동산에 집 내놨어. 집 보러 오면 문 열어줘야 해.
내가 아들 문제로 이혼을 안 해줄까, 전셋집을 빼야 하는데 안 나가고 버틸까 조바심이 났나 보다.
그래.
그렇게 해주마.
결론은 그랬다.
남편 입장에선
너에겐 단 한 푼도 주지 못한다.
왜? 네가 시집와서 한 게 없으니까.
대신 시집올 때 해온 혼수들은 가져가.
근데 혹시 그 식탁은 나 주면 안 되겠니?
우리 엄마 식탁이 너무 오래돼서.
어차피 너 이사해야 하는 집은 좁아서 식탁 못 놓을 거 아니니.
에어컨은 내가 산 거니까 내가 처분할게.
날짜 맞춰서 내 집에서 꺼져주렴.
나의 입장에선
그래. 다 가져가.
근데 식탁?
내가 어떤 집으로 이사할지 네가 알아?
더러운 네 돈, 나한테 한 푼도 안 줘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한 달에 한 번 내 아들 면접하게 해줘.
그래야 이혼해 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돈에 더럽고 깨끗한 게 어딨나.
돈 백만 원이라도 받았어야 한다.
물론 쉽사리 줄 인간도 아니지만.
옛말에 이혼할 땐 쓰던 프라이팬도 반으로 갈라 가져간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로구나.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 참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
쪼잔하기 그지없는 너와 나의 개싸움.
물론 그 갈등과 다툼은 면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용기 없던 그는 자기 부모를 앞세우던지, 혹은 문자메시지라는 편리하면서도 비겁한 의사소통 수단을 이용해 내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졌다.
아들을 재우고 캄캄해진 집의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아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
뒤통수에 만져지는 맨들 함이 뭔가 범상치 않아
잠든 아들이 깰까 살금살금 안방 화장대에서 거울을 봤는데.
아뿔싸.
임신 때 생겼다가 좋아졌던 원형탈모가 다시 시작된 게 아닌가.
아휴. 이러다가 조만간 대머리 되겠네.
하지만 이제 원형탈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보다 더 기막히고 대단한 일들이 내 인생에 펼쳐져 있어서인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화장대에서 굵은 빗을 꺼내 머리를 한쪽으로 잘 빗어 구멍 난 머리통을 가리면 그만이었다.
며칠 지나자, 다행히 아들은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어른도 하기 힘든 답답한 네블라이저도 콩순이 영상만 보여주면 꾹 참고 잘 해냈고, 그 쓰디쓴 약을 먹일때마다 한번 칭얼대지도 않고 꿀꺽 꿀꺽 잘 삼켜주는 고맙고 착한 내 아들이 나는 그저 애처로웠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결정된 사실을 알렸다.
왜 마음을 바꿨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 지금껏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 때마다
아버지 말 안 들어서 잘된 일이 하나도 없어서요.
고3 때 수능 성적 나오고 지방 교대 가라는 아버지 말 안 듣고 서울에 생활과학대 입학해서 변변치 못한 직업 얻었고,
이 사람이랑 결혼할 때도 결혼하지 말라고 힘들 거라고 하신 말씀 안 듣고 결혼했다가
2년도 못 살고 이혼당하기도 하고...
다 끝이 안 좋았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아버지 말씀 들어보려고요.
엄마가 지난번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아들까지 저처럼 거지같이 살게 할 수는 없잖아요.
- 그래 잘 생각했다.
그게 네 아들한테도 너한테도 더 나은 일이야.
다음 주말에 들릴 테니 집 보러 다니자.
너 살 방 한 칸은 아버지가 마련해 주마.
아버지께 결정된 사항을 얘기하면서도,
이게 정말 잘하는 일일까.
앞으로 내가 내 아들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저 집에서 과연 면접을 잘 이행할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심했다.
내 영혼과 정신은 이미 한없이 피폐해져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머리통에 총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이제 아들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날까지는 두 달 남짓이다.
나는 9월 말까지 내 몸뚱이 하나 누일 집을 구해야 하고 아들하고의 이별 전까지 내게 남은 모든 사랑을 아들에게 주어야만 한다.
다시금 말하지만 주변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던 때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주변의 친한 엄마들은 나와 아들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을 내어 주었다.
내가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함께 대공원에도 가주고 물놀이도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 걸 아는 엄마들은 반찬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아들의 간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정말 고마워.
주말마다 나는 아들을 아기 띠로 안고 수도권의 가장 저렴한 지역만 돌며 아버지가 지원해 주실 수
있는 금액에 맞춰 집을 보러 다녔다.
가능한 서울에 머물고 싶었지만 서울의 전셋값은
내 몸뚱이를 팔아도 어림없을 금액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저렴하다는 지역의 부동산에 전화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집값에 맞는 집이 있는지 문의하니
- 그 돈으론 서울에서 화장실밖에 못 구해요, 껄껄
- ...
나의 정색을 눈치챈 공인중개사가 얼른 웃음을 거둬드리더니 말을 바꿨다.
- 화장실이 밖에 있는 반지하라면 가능합니다.
부모가 하지 말라는 결혼을 하고, 이혼을 당하는 마당에 부모에게 돈을 더 내어 놓으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나는 그럴 성격도 못되었다.
한 달 가까이, 평일에는 아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려 노력하고 주말에는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보러 다닌 끝에
수도권 변두리의 조그마한 오피스텔을 얻게 되었다.
동네는 변변치 않았지만, 집은 깨끗한 편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집을 계약한 것은 8월 중순 무렵.
집주인에게 9월 말까지는 이사를 오기 어려우니
한 달 반 정도 집을 비워두겠다 고지하고
그렇게 내가 살 좁은 공간을 마련했다.
한강의 야경이 유독 아름답던 부유한 동네에서
비가 오면 물이 차고, 유흥가라 담배연기가 가득한 동네로.
나는 그렇게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제 너와 내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엄마는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