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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Sep 06. 2022

# 26. 홀로서기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하지만 이혼 전까지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께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그분께 거만을 떨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겠다고 떠났다가 정확히 1년 8개월 만에 나는 다시금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굉장히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매달릴 것이 있었고 바랐던 것이 너무도 간절했기에

내가 기댈 곳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


나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내가 이 땅에 목숨 부지하고 사는 동안 내 아들과

헤어지지 않고 만나면서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

내 아들이 내가 그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알고 살게 해달라는 것.

내 아들이 어느 곳에서 누구와 살더라도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게 해달라는 그 간절한 바람.

오직 그 한 가지 소망을 위해 나는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매주 소박한 미사를 드렸다.

세례를 받고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묵주기도를(묵주기도는 평균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매일 저녁 자기 전 하느님께 바쳤다.

만약에라도 기도를 빼먹거나 성당에 나가지 않으면

아들과 헤어지게 될까 봐 그저 두렵고 불안했다.


이혼서류는 접수했지만, 완벽한 이혼 상태는 아니었다. 자녀가 있는 부부가 협의이혼을 진행할 때, 부부는 3개월간의 숙려 기간을 갖는다.

즉, 아이가 있으니 이혼에 대해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법원에서 부부에게 권장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숙려 기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숙려 기간은 끝이 난다.

숙려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한번 이혼서류를 제출한 법원에 가서 판사의 확정판결을 받고 결정된 사항을 구청에 신고하면 법적으로 남남이 된다.

그런데 이런 절차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이미 우리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남남이었던 것을.

그저 서류상 남이 될때까진 약속한대로 한 달에 한 번있는 내 아들과의 면접을 지킬것이다.

그 이후가 문제이다.


나는 지금 수중에 단 50만원이 있다.

다행히 아버지가 3개월치의 관리비를 내주셨지만

50만 원으로 전기 요금, 가스 요금, 휴대폰비를 내고 나면 배를 쫄쫄 굶는다 해도 두 달 남짓 밖에 버티지 못할것이다.

직장을 구해야 한다.


내가 홀로 이 곳으로 돌아오고 2주 뒤는 추석이었다. 고로 직원을 구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뜩이나 취업하기 좋은 조건도 아니었지만 시기상으로도 취업이 쉽지는 않은 때였다.


고민이 많았다.

나는 사회에서 경단녀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나마 있는 경력도 이곳저곳 중구난방이었다.

이 상황에서 죽는 날까지 홀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앞으로 먹고 살 일이 빠듯할 수밖에 없다.

전문성을 갖춘, 오래도록 안정되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간호조무사 학원이 두어 군데 있었다. 일단 자격을 취득하면 나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학원에서 취업을 알선해 준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배려인가.

다 비슷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겠지만, 꼼꼼히 학원마다 상담을 받고 비교를 한 뒤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 학원비가 필요한데, 이번만 좀 도와주세요.


- 그래. 아버지가 학원비는 마련해 주마.

그런데 꼭 간호조무사를 하고 싶니?

피 보는 것도 무서워해서 대학 진학할 때 간호학과는 못 가겠다고 하더니 정말 할 수 있겠니?

아버지는 네가 그냥 책상 앞에 앉아 일했으면 좋겠다. 어찌 됐든 결정되면 얘기하거라. 학원비는 엄마 몰래 마련해 주마.


나의 아버지는 경기도 소재 모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다. 많은 급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먹고살기 궁핍한 급여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경제권은 엄마기 쥐고 있고 엄마는

나에게 많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아 하셨다.

그나마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자금을 마련해 주신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하고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나는 그렇게 여겼다.

고로 아버지가 엄마 몰래 마련해 주신다고 한 백만 원이 넘는 학원비는 아마도 매달 엄마에게 받는 20만 원의 용돈을 모으고 모아 꿍쳐놓은 비상금일 터였다.

마음이 아프다.

언제까지 부모에게 기대고 신세를 지는 못난 자식이어야 하나.


피가 무섭지.

혈관 찾고 주사 꽂고.

물론 무섭고 두렵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께 말하지 못했던.

간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던 더 큰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세상을 떠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처녀시절 간호사 셨다.

그리고 결혼해서 오빠와 나를 낳고 전업주부로 지내시다 빠듯한 교사 월급으로는 집 한 칸 마련하기 어려웠기에 보험 일을 시작하셨다.

너무 어려서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엄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시장 떡볶이 포장마차 아줌마들에게 보험을 팔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와 달리 악착같고 생활력 강했던 엄마는,

보험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 보험 퀸이 되었다.

그 당시 94년, 95년 즈음.

세금을 공제하고 실제 엄마가 수령했던 월 급여는 400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 물가로는 월 1000만원즈음 될까? 지금 회사에서 최저임금을 웃도는 급여를 받는 나와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연봉이다.

어쨌든 엄마가 보험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 집은 방 두 칸짜리 오래된 전세 아파트에서 방 세 칸짜리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는 자동차가 생겼다.

나는 퀸 사이즈 침대에서 잠을 잤고, 늘 남대문 시장에서 사주셨던 옷은 백화점 브랜드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1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보험을 시작해서 승승장구했던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3월.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고생만 하시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지독한 트라우마다.

나는 비교적 잘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 사건은 내 인생에서 나에게 뿌리 깊은, 아주 강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때문에 내가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거나 혹은 보험설계사가 되면 나도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될까 두려웠다.

나도 엄마처럼 병을 얻게 되고 마흔이 되는 해에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아픈 삶을 살게 될까 정말 두려웠다.

하지만 이 속내는 아버지에게도 오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평생 내가 지고 가야 할

나만의 무거운 십자가이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이고 뭐고 간에 먹고살아야 하는 눈앞의 현실이 더 크게 와닿는다.

지금 상황에선 간호조무사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마침 내가 이사 간 동네에 친한 언니가 살고 있었다.

이혼한다는 것도, 이혼남과 결혼했다는 것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언니가 내가 그 동네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알곤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추석연휴 이틀 전이었다.


- 저녁 먹자! 얼른 나와!!


걸어서 10분도 채 안되는 곳에서 결혼 이후 처음으로 언니를 만났다.

내 이야기를, 그동안의 나의 전쟁 같은 이야기를 들은 언니는 갑자기 소주 한 병을 시킨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셨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한 병을 마시면 부모도 못 알아보는 수준이다.

그런 내가 술을 배웠다.

내 나이 서른여섯에.

술이 술술 술술 들어간다.

가슴에 있던 얘기를 다 토해내고 나니 더 이상 술이 쓰지 않고 달았다.

쓰디쓴 것은 비단 술이 아니라 내 인생이리라.


- 제나야. 내가 생각해도 넌 조무사랑은 성향이 안맞아. 그러지 말고 내가 지금 xx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 정보통신처에서 계약 직원을 구하고 있어.

너 이전에 대학교에서 일한 경력 있으니까 여기 한번 지원해 봐. 사람 급하게 구한다고 하니까 자기소개서 잘 쓰면 잘 될 것 같아.

일단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나처럼 한국어 강사 준비하거나 그 때 간호학원다니거나 다른 길 생각하면 되잖아. 어때?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도 내가 간호사가 될 성향이 아닌 걸 알았기 때문인지.

긍정의 대답을 하고선 집에 돌아와 밤늦도록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다음 날, 다시는 내 인생에서 쓸 일 없을 거라 생각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구인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보내놓았다.

부디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길.


집에 혼자 멍하니 있으면 하루 종일 눈물바다이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아들 간식 먹여야 하는데.

지금쯤 낮잠 자고 있겠지?

엄마 찾고 울지는 않을까?

우리 아들은 닭고기를 좋아하는데.


뭘 좋아하는지. 어디 브랜드의 우유를 먹는지.

해지고 목욕하면 감기에 걸리니 가능하면 저녁먹이기 전에 목욕시키기 등

아들을 돌봐줄 조선족 입주도우미가 있다고 전남편에게 전해 들었다. 때문에 아이를 보내며 자세한 메모를 물건마다 붙여놓았지만 아마도 무시하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할퀴고 지나기 전에, 그래서 눈물샘이 터지기전에, 밖에 나가 돌아다녀야 한다.

주민센터를 찾아 전입신고도 하고, 경단녀를 위한 취업알선 제도도 찾아보려 길을 나섰다.

그런데 너무 허전해.

항상 아기 띠로 따뜻하고 묵직한 아들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며 돌아다니곤 했는데 아들 없이 홀로 하는 외출이 너무나 허전하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주민센터에서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을 잃었다. 원래도 길치인데다 정신이 딴 데 팔려있어 그런지 아무리 봐도 어디로 가야 집으로 갈 수 있을 지 알 길이 없다.

지금이야 네이버 지도나 구글 지도로 길을 찾곤 하지만(그마저도 지독한 길치인 나는 소용이 없다.)

그 당시에는 그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몰랐다.

별일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

걷다 보니 멀찍이 파출소가 보인다.


- 저 길을 잃어버려서요.


30대 여자가 길을 잃었다며 파출소에서 대성통곡을 하니 근무하는 경찰분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저희가 집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울지 마세요.

괜찮아요. 바로 근처에요.


아마 그들은 내가 지적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여자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렇게 경찰들의 도움을 받아(바쁘신데, 정말 죄송했어요ㅠ) 나의 1.5룸 오피스텔로 무사히 돌아왔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집에 와서도 내 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이 지독한 아픔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 뜨거운 그리움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잦아들 줄 알았던 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움이 죄책감이 되고 미안함이 보고픔이 되어 켜켜이 쌓여만 간다.

오늘 밤도 일기장에다 아들에게 엄마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너무 미안하고, 많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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