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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r 07. 2023

# 12. 강릉, 우리가 함께 한 첫 여행지

비밀을 공유한 자,

그리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이들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리다.


우리는 사내에서 여전히 과장님과 대리님이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연인이 되기 전부터 옆자리에 앉아 가끔 간식도 나눠먹고 때로는 노닥거리기도 하며

함께 점심 먹는 무리의 멤버였기에 우리가 좀 더 붙어 다닌다고 해도 남들의 눈에는 그저 친한 직장동료였을 것이다.


어쩌면, 친하든 안 친하든 일곱 살이나 많은 여자와 일곱 살 어린 남자가 연애할 것이란 상상을 아무도 못했을지도 모르지.

사회적인 통념이 그러했으니까.


여하튼 남들의 눈은 무시하고, 남들의 생각도 고려하지 않고 한 번의 큰 고비를 넘기고서야 조금 더 단단한 사랑을 이어가게 되었다.


회사에는 그의 누나와 사촌 형이 두 명이나 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 처진다.

너와 나의 평화를 위해, 너와 나의 사랑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리라...

그러다 어느 날 혹시라도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처음부터 너와 내가 아무 사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평온히 하루하루를 보내면 되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다시 한번 그와의 사랑을 시작한다.


그는 나에게 그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하고 애달픈지 증명하고 싶어 했다.


나는 담배 냄새를 보통 사람 이상으로 싫어했고,

개띠여서 그런지 타고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인지 후각이 매우 예민했다.


그는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태울 정도로 애연가이다.

직장동료일 적에도 그가 쉬는 시간을 이용해 담배를 피우고 오면 그의 등 뒤에서 몰래 페브리즈를 촉촉 뿌려대던 나였는데.

그런 그가 나를 위해 담배를 끊었다.

처음엔 줄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담배를 사지도 않는다.

오.

사랑이 이렇게 위대한 것이었나.

그에게선 몇 달째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이 절정에 달했다. 이제 여름휴가를 가야지 :)


내가 연차를 사용할 때 내 업무를 덜어주던 그였기에 둘이 함께 휴가를 맞춰서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우리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하루씩 빗겨 휴가를 잡으면, 같이 어딜 간다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연차를 관리하는 담당 과장의 눈치가 대단히 빠르기는 하지만 그 눈치 빠른 과장조차도 우리 둘의 관계를 의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하루씩 빗겨서 둘이 함께 휴가를 내는 정도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눈치 빠른 과장의 눈치는 정상작동을 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우리의 휴가 기간 동안 업무를 대체해 줄 수 있는 자를 적당히 골라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첫 여행이다.

여행 장소부터 고민인 나와 달리, 그는 어딜 가도 상관이 없단다.

오직 나만 옆에 있으면.^^;


그래. 처음엔 다 너같이 말하더라.

더군다나 이 사지 육신 멀쩡한 총각이, 지난 몇 년간 여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데

지금 이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게 다가왔을까.

여자친구와 해보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아마 잘은 몰라도 몸이 달았을것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릉으로 여행 장소를 정했다.

ISFJ 완벽한 계획형 인간인 A형의 여자와,

ISTP 자유로운 영혼인 B형 남자가 함께 각자만의 여행 계획을 세운다.


성격처럼 나는 시간별로 관광장소를 정하고 어느 식당을 가야 할지 무얼 먹어야 할지 까페는 어디로 가야할지 인터넷을 검색하며 세세한 계획을 세운다.


혹시라도 계획이 틀어질 것을 대비해 플랜 B와

플랜 C까지 짜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나도 내 성격이 참 피곤해.


반면에 어딜 가든, 뭘 먹든, 뭘 보든 그저 그 순간의 기분이 중요한 남자는 인터넷을 검색하는 내내 허허실실 기분 좋은 웃음만 보인다.

우리 안다투고 잘 다녀올 수 있겠지?


펜션을 예약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동안 설렘과 죄책감과 기대감과 미안함이 반복적으로 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모른척하고 설렘과 기대감만 가지고 싶었던 나의 거만한 이기심.

그럼에도 이 남자와의 여행이 너무나 기다려지는 것은 내가 마흔을 먹고, 이혼을 했어도 여전히 나는 여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8월, 여름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함께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 기간엔 나의 마흔 번째 생일이 있다.

결혼하기 전엔 생일에 미역국은 먹지 못했어도,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결혼하고 맞았던 두 번의 생일은 나와 내 아들.

오직 둘만의 순간이었다.


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

언제쯤 나는 이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휴가철이 조금 지났다 해도 서울에서 강릉 가는 길은 별 수없이 막힌다.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음에도 강릉까진 5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남자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거북이 운전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그저 함께 하는 여행길에 대한 설렘과 우리가 함께 보낼 시간들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평온한 그의 얼굴을 보자니 지난 몇 년간 미처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온다.


강릉에서는 어떤 시간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결혼하고 2년,

이혼하고 4년 만에 나는 다시 사랑에 가슴 떨리는 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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