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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r 24. 2023

# 13. 마흔 살, 20년만에 먹어보는 생일미역국

스무 살 무렵,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누군가가 없었기에 생일날 미역국을 챙겨 먹는 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던 기억이다.


음식을 못하는 편이 아니어서, 혼자 지내면서도 심심치 않게 소고기를 잔뜩 넣은 미역국을 끓여먹곤 했지만, 유난스럽게도 생일날의 미역국은 특별하다.

그것도 내가 아닌 타인이 끓여주는 미역국은.


못된 생각이지만, 친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생일 미역국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드문드문 해오며 그렇게 마흔 살까지 살아왔다.


2년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두 번 맞았던 생일날에도 미역국은 커녕 남편과

아들과 오붓하게 생일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결혼하고 첫 생일날, 친정식구들이 찾아와 잠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1박2일 여행을 가야 해서 딸을 돌볼 사람이 없으니 당장 내 아들을 집으로 보내라고 생일을 맞은 며느리에게 전화로 호통을 쳤던 시어머니가 있었다.

친정식구들 앞에서 얼마나 낯이 뜨거웠는지.


아득하다... 언제쯤이면 지난 어두운 날들 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우울한 생각도 잠시.

내 생일을 끼고 막바지 여름휴가를 왔다.

그것도 사랑하는 내 어리고 착한 남자친구와 함께.

급히 예약해 시설이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던 남자친구의 우려와는 달리

강릉 어느 숲속에 조그마하게 자리한 펜션은 너무 소박하고 예뻤으며,

짙은 풀냄새로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충분히 달래줄 수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짐을 풀은 우리는 ISFJ.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 나의 여행 계획에 맞춰 조금은 피곤한듯한 강릉, 평창 일대의 관광을 시작했다.


얼마 만에 여행인지.

이혼하고 첫 추석.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를 위해 가족이 함께 떠났던 가평여행 이후 아마도 4년 만에 처음 떠나는 여행이었으리라.


서른 즈음.

기념일마다 순댓국을 사주던 짠돌이 남자친구와 왔었던 오대산 국립공원의 전나무길.

그때 그 짠돌이 남자친구는 전나무 숲을 걸으며 말했었다.


- 다음에 이곳을 또 오게 된다면, 제나 너와 오고 싶어.


그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못나고 부족한 나를 순수히 사랑해 주는 일곱 살 어린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이곳에 서있다.


장마철은 한참 지났음에도 펜션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해서 비가 온다.

빗물 덕에 전나무 숲의 녹음은 더욱 짙어지고,

숲의 향기와 나무의 냄새도 한층 더 진해졌지만

질퍽거리는 흙길을 밟자니 다소 아쉬운 마음이 살포시 올라온다.

나의 아쉬움을 눈치채지 못한 남자친구는 진흙과

풀 사이로 펄쩍거리는 새끼 개구리를 발견하고는

아이처럼 펄쩍 뛰며 좋아한다.

네가 개구리인지, 개구리가 너인지 : )


- 자기 개구리 잡아봤어? 우리 이름 붙여주자. 이 개구리는 에미스야 에미스.


왜 에미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에미스를 보며

함께 미소 짓던 너와 나.

자유롭고 편안해.


눈을 감고 오대산 전나무 숲길의 피톤치드를 잔뜩 들이마시고 부푼 폐와 부푼 설렘으로 여행을 이어간다. 이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지금 너무 평화롭고 행복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에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내 아들의 얼굴이 나무 사이로 살며시 보인다.


지금 너는 무얼 하고 있을까?


2박 3일 여행의 첫날 저녁.

마흔 번째 내 생일이다.

미역국을 꼭 끓여주고 싶다며 일찌감치 펜션으로 돌아와 빗물을 닦아내고

자그마한 부엌의 한켠에서 어설픈 포즈로 마늘을 찧던 모습이 왜 그리 배 아프게 웃겼던 건지.

180센티가 넘는 키에 다소 낮은 싱크대가 불편했는지, 기마자세 비슷한 포즈로

이리 튀고 저리 도망가는 마늘을 붙잡고 빻는 모습에 이혼하고 처음으로 떼굴떼굴 배를 잡고 구르며 눈물이 나게 웃어댔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펜션 마당 한켠에 바베큐 준비를 한다.

어찌어찌 미역국을 완성한 그는 우리의 첫 여행을, 그리고 나의 생일을 기념하고 싶다며

잔디 한켠에 동영상 촬영까지 준비한다.


열번 정도 연애를 해본것 같다.

결혼도 한번 해봤다.

하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혹은 함께 살부비며 살아왔던 그 누구도 내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이 없다.

내 생일을 이렇게 거룩히 정성껏 챙겨준 사람도 없다.

어둑어둑해지는 한여름의 생일날.

숲속에 자리한 펜션의 중앙에는 너와 나의 마음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장작불이 하늘높이 타오른다.


우리에게 내어준 테이블위에 그가 끓여낸 어설픈 미역국이 놓여있고 목장갑을 끼고 뜨거움과 매운연기를 참아내며 맛있게 구워낸 고기가 놓여있다.

그리고 내 앞에 헐레벌떡 앉는 너.

마늘 찧는 얘길 하면서 깔깔대고 웃다가 이내 조울증 환자처럼 눈물이 팡 쏟아진다.

너무 행복해.

지난 5년이 죽고싶을만큼 힘들었는데,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고된 시집살이를 했던 것보다도

졸지에 서른여섯 이혼녀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했던 것도

앞으로 죽는 날까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캄캄한밤처럼 암담했던 지난날도


그 무엇보다도

내 일부, 내 심장.

하얗고 말간 내 아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까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며 지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하얗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만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버무려져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눈물로 흐르는 지금 이 순간.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

서러움인지

행복함인지

두려움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사로잡는 지금.

이 눈물의 의미가 어떤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저 서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나를 보며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너의 작고 조그만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뿌옇게 보일뿐.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참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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