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친구와 작업 상담하기
멀리 사는 친구의 작업 상담을 한다. 몇 개월에 한 번 전화나 문자로 신나게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친구 중에 하나다. 일상을 나누고 가까이 있다가 서로 멀리 떠난 친구들은 오히려 한 번 연락하기가 어려운데, 그는 오히려 때를 상관않고 연락할 수 있다. 작업 얘기를 하니까 내가 최근에 직장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고 이사를 생각하고 누구를 새로 만났느니 이런 얘기는 스킵해도 된다.
오늘 작업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어려운 문제에 이미 봉착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나도 잘 모르는 분야다. 그러다가 그냥 내가 봤던 신기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해 준다. 그는 요상한 이야기만 해 줘도 알아서 쓸 만한 아이디어를 구분해낸다.
내가 전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중구난방하다. 공통점은 바닷물이라는 것 뿐.
1.
워터베어waterbear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플랑크톤이다. 대학원 시절 랩에 있던 바닷물 수조에서 물을 퍼다가 현미경을 통해 보게 됐는데, 통통한 다리가 여럿 달린 무언가가 버둥버둥 움직인다. 이토록 튼실하고 귀여운 생명체가 하필 내가 건진 한줌의 바닷물에서, 알게algae에 갇혀 휘둥휘둥 용쓰고 있는 것이다. 새우도, 지렁이도 아닌, 태초의 하마같은 모습.
도대체 물질세상의 프랙탈적인 구조는 얼마나 광범위한것일까? 저렇게 작은 통통하고 활기찬 생명이 있다면... 우리만큼 크고 통통하고 늘어진 신체가 있다면... 물질세상의 스펙트럼은 그 척도를 크기로만 두어도 이렇게 광활한데, 우리가 모르는, 기준점이 다른 물질세상은 얼마나 광활한 것인지....
2.
시글라스sea glass는 바다에 버려진 유리 물체의 파편들이 닳아서 둥글하거나 뭉툭한 자갈처럼 변한 물체들이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하고 본연의 유리 색을 가지고 있어 채도 높게 빛나는 것들은 특히 해변에서 발견하기 좋다. 사람들이 청소할 겸 주워 모으기도 하지만 플라스틱만큼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오염물질로 인식되진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시글라스를 모아 구슬처럼 다루어 장식품이나 소품을 만든다.
이렇게 큰 물질적 힘과 시간의 결과가 이렇게 촉각적,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모양이라면... 이렇게 소중하게 사랑받는 대상이라면... 가장 거칠고 꾸준하고 강력한 힘의 반작용으로 가장 부드럽고 반들거리고 빛나는 무언가가 생길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걸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글라스같은 현상을 보며, 크로노스가 자른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로 떨어지며 일으킨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의 신화를 상상했을까. 폭력과 권력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탄생신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뚝 끊겨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다 몇 일 혹은 몇 주 뒤에 대화를 이어간다.
서로 시간을 맞추거나 약속을 하다가 깨어져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바로바로 궁금한 점부터 물어본다. 묻는 안부에 대답이 없어 본론으로 들어가기 애매하지 않도록, 본론부터 던져놓고 시간이 되면 서로 답장한다.
각자의 삶의 속도를 희생하지 않으며 나누는 대화. 이 사이에는 내 캘린터에 표할만한 구체적인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대화하고자 하는 의도와 호기심으로 전혀 새로운 시공간이 탄생한다. 갑자기 불현듯 뭉게뭉게 피어올라 번개가 내리치는 듯 작업 고민을 나누고 수다의 비를 왕창 내리고 다시 개어 없어진다.
보이지 않지만 절대적인 실체가 있는 물분자와 같은 대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