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기행
#서체기행 유명해지고 싶어서요
어젠 오후 5시에 “저는 성과가 안나와 힘들어요. 성과가 안 날 때 어떻게 버티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미팅 1시간 전인 오후 4시에 iF DESIGN AWARD 2026에서 탈락했다는 결과지를 본 뒤라 ‘저 오늘도 탈락했어요. 저도 포기하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서체 말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사명감이 있어서 버티는 게 아니라, 정말 서체밖에 없거든요.”라고 대답했어요.
어제 대답한 걸 오늘 생각해 보니 서체밖에 없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좋은 서체를 만드는 일 만큼, 저는 어워드 수상 소식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서체 디자인을 잘하고 싶었습니다. 멋진 서체 디자이너들처럼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어요. 서체 디자인 실력보단 나 자신이 유명해지고 싶고, 성과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서체 디자인 일을 하는 것 보다 ‘유명한 서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거였어요. 그러니까 저는 ‘매거진B’는 안 만들고 머리를 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배민’은 안 만들고 머리를 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세계디자인 수도’는 안 만들고 머리를 밀어야겠다고만 생각하는 쪽입니다. 머리를 밀어야 디자인을 잘하는 게 아닌데 멋진 디자이너들을 겉으로만 닮고 싶어 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냐는 질문에 저는 “서체밖에 없습니다.” 보단 “유명한 서체 디자이너가 되는 걸 늘 상상하며 지냈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게 더 솔직한 답이에요. 대학원 시절, 서체 디자인 수업 시간에 “왜 서체 디자인 수업 오세요?” “서체 디자인을 잘하고 싶어요.” “왜 잘하고 싶으세요?” “유명해지고 싶어서요.” 라고 민본 교수님과 대화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정신이 가난했습니다. 탈락 덕분에 저를 한참 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