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shpa2> 불완전한 신의 완전성을 위한 여정.

by 조화득

*스포일러 주의

*영화 정보는 X(구 트위터)의 남인도 영화 팬들의 트윗에서 발췌하였다. 특정 영화 서적에서 바후발리2를 타밀지역 영화라고 서술하는 강한 오류를 발견했기에, 오히려 팬들의 트윗이 신뢰도가 높다 하겠다.

*참고 정보는 마지막에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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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영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대규모 군무와 노래, 그리고 발리우드다. 발리우드 혹은 '볼리우드'는 봄베이(Bombay)와 할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다. (봄베이는 1995년부터 뭄바이(Mumbai)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발리우드는 북인도 뭄바이, 힌디어 중심 영화권이다. 그러나 내가 리뷰하려는 영화는 일명 ‘톨리우드’, 텔루구어 영화 <Pushpa2 : 절대 권력> 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푸쉬파는 형제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막노동꾼으로 사는 남자의 밀수업자 성공기다. 지금 리뷰하는 <Pushpa2 : 절대 권력>은 푸쉬파의 성공 이후를 다루고 있다.


<Pushpa1 : the rise>는 헐리웃 영화 <스카페이스> 와 유사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다. 후속작 <Pushpa2 : 절대 권력>은 현재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다룬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든다. 한 마을을 먹여 살리고 현금다발을 트럭으로 가진 사내에게 ‘성(姓)’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받는 그 이상의 감정을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 문화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이 부분은 양해를 부탁드린다.) 내가 느낀 대로 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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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자부심이 엄청나다. 시작부터 “Icon star : Allu Arjun“이라고 자랑한다. 독특하고 독보적인, 어쩌면 자신만의 아우라를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배우라는 의미일까. 다른 문화에서 맛보지 못한 당당함이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생각해보라. 시작부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이름을 걸고 시작하진 않는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푸쉬파를 ‘신’에게 비유하며 온갖 찬사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 속 푸쉬파의 행동을 보면, 그 찬사가 당연하다. 티루파티의 가난하고 어려운 자라면 푸쉬파에게 도움을 청할지어다!) 여기서 다른 문화권의 영화를 생각해 보자. 개신교와 가톨릭 종교권에서 신을 다룬 영화는 매우 많다. 예수의 고통이나 절대자에 대한 사랑, 애정 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다. 이슬람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들은 알라의 얼굴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을 신에 비유하는 일은 금기다.


이 영화는 다르다. 아예 푸쉬파를 신처럼 은유하고 있다. 영화 오프닝에서 일본 야쿠자에게 돈을 받기 위해 40일간 컨테이너에서 숨어서 지낸다.



인도-일본 항해 일수를 검색했더니 최대 30일이다. 40일? 그렇다. 성경에서 예수가 공적인 삶을 살기 전 40일의 금식기도, 노아의 방주 40일 등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숫자다. 푸쉬파도 원하는 권력(돈)을 얻기 위해 40일간 빛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의 고난마저 신으로 만드는 뻔뻔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제 영화 중반으로 넘어가 보자. 자타라 축제에서 조카를 성추행하는 무리를 흠씬 두들겨 패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 무리는 악마 뿔 머리띠를 하고 있다.



푸쉬파의 발목에 짤랑거리는 방울이 클로즈업되며 그의 움직임은 슬로우모션으로 흐른다. 슬로우모션의 효과는 단순히 느린 속도에서 오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푸쉬파의 감정과 극적인 상황을 강조한다. 심지어 그의 동작은 시바 신의 모습이며, 그의 머리 위에 뱀 머리 3개가 있다. 세계 신화에서 뱀은 언제나 상징적인 존재였다.


후반으로 넘어가면, 조카를 납치한 무리를 만나러 외딴 신전에 간다. 칼리를 모시는 신전에서 푸쉬파는 모욕을 당한다. 성추행범들은 수치심을 복수하고자 그에게 여성용 사리와 각종 장신구, 그리고 해골 목걸이를 걸어준다. 그것도 신전에있던 여신의 것으로 말이다. 칼리는 복수의 여신이고, 푸쉬파는 그 곳에서 시바의 무기, 칼, 삼지창 그리고 활 대신 총으로 납치범들을 응징하며 복수를 완성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를 방해하는 자가 누구인가. 푸쉬파는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인간은 거침없이 제거할 뿐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을 거머쥔 푸시파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세계 곳곳에 사는 신들을 보라. 그들은 완벽하지 않아도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푸쉬파를 보라. 스리발리가 임신한 순간, 그는 여장하고 광기 어린 춤을 추며 간절히 딸이기를 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을 바란다니? 그는 성(姓)을 물려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오히려 결혼을 통해 성(姓)을 얻을 수 있는 딸을 원한다.


그들에게 대체 성(姓)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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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스리발리는 기도하러 신전에 간다. 스와미에게 기도 내용을 말하려는 순간, 푸쉬파의 배다른 형이 끼어든다. 푸쉬파에겐 성(姓)이 없으니, 혈통이 없고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없다고. 그러자 스리발리가 대답한다.



모든 이름이 신의 것인데 어찌 성이 있겠습니까. 나의 남편도 마찬가지예요. 신과 다름없죠. 신의 이름으로 아르차나 기도를 올려주세요.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신에게 비유하며, 성(姓)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스리발리의 사랑도 푸쉬파의 무의식 속 불완전함을 녹이지 못한다. 완전함에 대한 광기는 노래 “Gango renuka talli"에서 드러난다. 옷차림은 우스꽝스럽다. 붉게 장식된 발과 방울, 온갖 화려한 여성용 장신구와 사리, 파란 피부, 게다가 직접 이마에 삼지창으로 긋는다. 짙은 수염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오는건 왜일까.



pushpa2의 ost <Gango renuka talli>


푸쉬파가 사는 세상의 성(姓)은 어떤 공동체, 혹은 출신 마을, 카스트, 사회적 지위를 알려주는 단어다. 하지만 사생아 푸쉬파는 성(姓)을 받지 못한다. 막노동꾼 출신이라는 비하보다,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서러움이 더 컸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를 물려줄 수 없었다. 푸쉬파가 사람들에게 힌두교속 강한 신같은 존재로 비유 당한다 한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말할 수 있는 성(姓)이 없는 인간이었다.


푸쉬파는 분명 모든 걸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성(姓)이 없음으로써 사회 안에 들어가지 못한 비주류 인생으로 정의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인간.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없다, 돈은 넘쳐나고 주지사를 결정할 절대 권력을 얻었어도 정상 사회 속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스리발리가 말한다.



당신은 푸쉬파 라지잖아. 당신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인데, 뭐가 그렇게 절실해? 무슨 소원을 빌었어?



딸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난 고작 막노동꾼이라 성을 물려줄 수 없어.

푸쉬파는 부계 중심 사회에서 자신과 같은 불완전함을 다음 세대에 주고 싶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이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성(姓)을 알아야 한다. 남자의 정체성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아들이 태어난다면, 아들 역시 자신을 설명할 ‘성(姓)’이 없는 셈이다. 푸쉬파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서러움을, 한을 어떻게 나의 자손에게 남기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가부장 사회에서 360도 돌아버린 사랑을 보여준다. 남자에게 성이 이어지는 사회에서 아들이 정상 사회 속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딸을 원하는 푸쉬파의 춤과 노래에서 우리는 강렬한 광기를 느끼게 된다.

아내가 바라는 대로 주지사와의 사진을 걸어둬도, 사랑하는 조카를 구하기 위해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도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다른 형이 푸쉬파를 형제로 인정하며 청첩장을 건넨 순간, 붉은 청첩장 안고 우는건 단지 서러움이 풀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드디어 그가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있고, 곧 태어날 자식에게 당당한 아버지이자 정상사회 속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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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의 신은 언제나 부족한 모습으로 낮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화 속 신들의 모습은 인간적인 사랑이 있었다. 인도 문화 속 신은 어떠한가. 칼리(영화 속 마지막 장면의 신전 여신)는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파괴하며 죽음을 선사했다. 파괴와 죽음이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힌두교 속 인간은 직선의 삶이 아닌, 윤회의 삶을 말한다. 칼리의 파괴와 죽음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라면, 푸쉬파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여준 파괴와 죽음으로 인해, 그는 성(姓)을 받게 되었고 다시 태어났다.


푸쉬파 덕분에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보라. 이제 그는 근본 없는, 혈통을 알 수 없는 막노동꾼이 아니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느 사회에 속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할 수 없다면 절대 권력과 돈은 그의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해골 목걸이를 하고 삼지창을 휘두르는 모습이야말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을 떠올리게 한다. 에로티즘이란 전체적으로 금기의 위반이며 인간적인 행위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가 여장하는 것은 수치이며 금기이다. 금기를 위반하며 다시 태어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남자가 푸쉬파였다. 극단적인 가부장적 광기는 여성성을 자신의 것으로 융합하여 엄청난 생명력으로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나’는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완전한 신이자, 절대 권력이 되었다. 그 사회가 비정상적 사회라도 어떠한가.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참고

• 노창현, 성종현, 신호림. 『새로운 문화콘텐츠학: 2025년 개정판』. 2025.

• 월간미술, 「이슬람미술의 역사」

https://monthlyart.com/01-special-feature/special-feature-이슬람미술의-역사/미술사

• Goodnews1, 「예수 40일」

https://www.goodnews1.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95850

• 이광수. 『인도인의 100문 100답』. 엘피, 2018.

•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조한경 옮김.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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