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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Dec 19. 2022

언어에 대한 급진적 단상

사유, 신조어, 번역, 차이, 비트겐슈타인


1.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기에 앞서, 각개의 개념을 매개하여 명시적 사고를 구성하는 질료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아직 모호한 채로 남아있는 인상, 관념을 분명한 윤곽을 가진 명시적 개념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화자의 체계적 사고의 흐름, 그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가 선택하는 어휘와 발화를 구성하는 방식이 그가 어떻게 사유하는 사람인가를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어휘, 표현을 선택하는 데에, 표현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확히 부합 시키는 데에 충분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강' 의미가 통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느슨한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느슨하고 매 사안에 있어서 부정확한,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인간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꼭 사람이 달변, 달필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습관의 문제이다. 가능한 한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려 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정교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상, 나는 당장의 말의 세련됨과는 별개로, 그런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머지않아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분명해지면, 유창한 말은 자연히 그 뒤를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어떤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가짓수는 그가 얼마나 어휘를 매개로 한 개념화에 충실한지, 다시 말해, 얼마나 정교하고 활발하게 현실의 일면들을 추상화 하는지에 관련해 있다. 개인이 많은 어휘를 구사하고 그것들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다는 건 그가 그만큼 현실을 세분된 개념들을 통해서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가 많지 않고, 어휘들간의 차이를 엄밀하게 구분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의 무딘 언어와 같이,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획되지 못한 모호한 현실 인식의 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개인의 언어 체계는 개인의 인식 속에서 추상화된 현실의 체계 자체이며, 현실을 인식하는 개인의 경험 지평을 결정짓는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규정한 것이다.


3. 대부분의 신조어, 욕설은 집단 사이에서 미리 공유된 코드와 모호한 정서 자체(화자가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환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고 활용된다는 점에서, 광범위한 쓰임새를 가진다. 애당초 특정한 의미를 매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어디에나 아무렇게나 동원될 수 있다. 그런 말은 어디에다 끼워 맞춰도 대화가 통하니까 편리하다. 따라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세심하게 어휘를 선택하기 보다, 이처럼 불분명하고 무의미하기 까지 한 표현을 활용하려 하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다. 구태여 정확한 표현을 구사할 필요없이, 대강 말이 통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나 부정확한 말은 부정확한 사고에 후행한다. 그것은 말과 말을 통해 구체화되는 사고의 정제를 게을리하는 지적 태만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지적 퇴보의 징조다. 왜냐하면 부정확한 말이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수록, 정확한 표현에 대응하는 치밀한 사유의 필요는 감소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야호, 엄준식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의식 수준은 그들의 언어만큼이나 지리멸렬한 것임이 틀림없다.


4. 각각의 언어 체계는 그것이 유래하였거나 구체화하고자 하는 고유한 의식의 구조를 체화한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온전히 -의미의 훼손이나 번역어의 침투없이- 옮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원어를 번역어의 체계에 대응하는 과정인데, 양자는 실제로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원어의 특정한 표현, 개념에 대응하는 번역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원어의 본연의 의미를 번역어의 체계에 맞추어 적절히 변형해야 할 필요가 요청된다. (이를 소위 '의역'이라 부른다.) 예컨대 spill the tea라는 관용구를 문자 자체의 의미만을 참조하여 번역해서는 실제로 그러한 표현을 통해 의도된 의미를 표현할 수 없다. 그 의미를 온전히 밝히려면 문구를 구성하는 단어들 각각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차를 흘리다.'라는 표현이 영어의 어떤 맥락에서 동원되는지에 관하여 언어 체계 자체에 대한 참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인 왜곡이 발생한다. 한국어에서는 '차를 흘리다.'라는 표현에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것과 같은 함의(비밀, 정보를 누설하다)가 내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spill the tea라는 기표에 근거해서가 아닌, 그 관용적 기의(정보를 누설하다)에 근거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표현이 의도하는 함의를 전달할 수는 있으나, 본연의 기표와 그 성분 각각에 대응하는 형식적(사전적) 의미, 그리고 그 자체의 관용적 의미를 결정하는 원어의 체계적 맥락은 소실되고 만다. 다시 말해, spill the tea라는 문구 자체는 사라지고 그러한 표현으로 부터 발라내어진 의미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5. 그래서 번역은 기호가 다른 동등한 의미를 가진 기호로 교환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역자에 의해 새로 '대안적 원문'이 쓰여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6. 사용하는 말이 다르다는 사실만큼 서로가 대조적인 타자임을 드러내는 사실이 없다. 쓰는 말이 다르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는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쓰는 말이 다른 사람과는 어울릴 수가 없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는 관심사, 사고관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소통에 요구되는 기본 개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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