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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Apr 09. 2024

해석의 문제에 선행하는 인식의 문제

공론 과정 중 다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의견, 관점의 불일치는 객관적인 사실 인식상의 차이에서가 아닌, 다만 보편적 사실 인식에 대한 해석의 불일치에서 비롯한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이에 따르면, 공론에서 논점이 위치하는 사실 자체가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의 객관적, 실재적인 본성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도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고 다뤄야 할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만이 문제가 될 따름이다.


이런 생각은 사실 인식이 곧 사실 자체, 물자체에 대한 지각 내용이 아니라, 사실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인지적인 구성물이면서 그 자체가 일련의 해석의 산물임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틀렸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지각하거나 지칭할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표상이 아니라, 그 주관적 지각의 내용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실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사물, 사건을 그것들 사이의 개연적인 인접성을 통해 연관짓는 인지적 프로세스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사물이 지각되고 그것이 의식에 표상되는 양상을 미리부터 규정하는 선험적 형식에 불가피하게 구애받는다. 예컨대, 인과라는 관념은 우리가 직접 원인이 결과를 추동하는 인과율 자체의 작용을 감지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인접하는 사태의 전후 관계로부터 개연적으로 추론될 따름이며, 각각의 색채에 대한 관념은 실제로는 내부에 일정한 구획이 존재하지 않는 가시 광선의 연속적인 스펙트럼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특정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일련의 종교적, 주술적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들은 개인이 지닌 문화적 배경이 개인에게 지각되는 사실의 양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존재의 임재, 기적, 주술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교훈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할 수 있고 실증할 수도 있는 현실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물질적 구성, 일반 원리에 대한 기술 역시 이러한 사실 인식의 근원적인 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현대에 기본 입자와 그것들 사이의 네 가지 기본 상호 작용으로 표현되는 물리 현상들은 과거 사물, 그것을 이루는 원소에 내재된 고유한 목적론적 지향성을 가정하는 자연 철학의 사유로 설명되었던 것들이다. '중력'은 그러한 개념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현실의 일부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공유되는 진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충분히 정직하게 증언하는 한 잠재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정되는 진실의 보편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주어진 사물, 사건에 대해 동일한 관찰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실질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동일한 대상에 대한 관찰이 여러 사람에게 동류의 인식을 가져다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자주 공론의 주요한 쟁점은 사실의 주관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에 앞서, 사실 자체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에 관한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 위치한다. 즉, 우리는 자주 우리가 공론의 주제로 놓고 다퉈야 할 사실이 어떤 것인지를 합의 내리지 못한다. 가령, 기후 위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견의 여지없이 당면한 현실이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산업 시대 이후 지구 평균 기온의 일관된 상승 추세를 나타내는 동일한 범주의 경험적 데이터가 기후 위기론자들에게는 인간의 환경 개입으로 인한 급격한 기후 변동을 실증하는 지표로 받아들여지는 한편, 기후 위기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구의 역사에서 숱하게 있었던 점진적인 기후 변화의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는 기후 변화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그 관여의 정도가 크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음모론'은 모든 거시적인 현실의 파탄이 배후의 조정자들에 인위적으로 조장된다는 단순한 전제에 기초한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해 창발되는 것은 없다. 개인의 이지를 넘어선 현실의 복잡성, 구성 요소들의 무작위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하나의 생물인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체계의 외양은 민중을 기만하고 그들의 이해를 저해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 어쩌면 위기를 만들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스템은 인간 본연의 이지적 한계로 말미암아 피할 수 없는 오류의 일환이 아니라, 모종의 의도 하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즉, 보통 사람들이 현실의 불가피한 복잡성의 일면으로 이해하는 체제의 외연 자체가 음모론자들에게는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실증이 된다.


'프레임'을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인지적 왜곡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일반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가 표상하는 일체의 사실 인식은 이미 그 각각에 작용하는 프레임의 산물이다. 즉, 인간의 인식은 우리가 무엇을 유의미한 사실의 단위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인지적 규정의 심의를 통해 결정된다. 단순히 '팩트'에 기반한 지식의 축적, 교육을 통해 시민들에게 올바른 관점, 생각을 함양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이런 의미에서 순진하기 그지없다. 지식의 누적은 언제나 도식적으로 정해진 진보의 경로를 향하지도, 계몽적 각성에 귀결하지도 않는다. 지식은 계몽주의자들이 경계해야 할 또 다른 미혹으로써,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사실의 '정당한' 양상을 결정짓는 또 다른 사전 심의 규정을 구성할 따름이다. 전근대 공동 사회가 만물을 보편자로부터의 열화된 파생물로 간주하여 우주적, 신적 질서 아래 종속시켜 신비화 했다면, 현대의 제도화된 계몽은 같은 대상들을 행정적 관리를 통해 조작 가능한 요소들로서 '기계 장치의 신' 아래 놓아두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만인에게 균질하게 주어지는 공통된 사실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고 그러한 문제의 연장에서 사실에 대한 공통된 합의 또한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공동의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실재를 대면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공통된 사실 인식의 상, 이해의 기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관점의 차이는 대상에게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해석의 차이이기에 앞서, 해석의 대상을 각기 다른 내적 규정 하에서 의식에 표상하는 각자가 지닌 인식론적 기반의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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