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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onthewall
Aug 16. 2024
버추얼 유튜버 열풍에 대한 불만과 멸시는 그 가상적인, 잘 꾸며진 외형과 목소리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에 열광한다는 것, 즉, 진정한 현실의 가능성을 외면하고 그들의 가상성 자체를 추종한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추한' 현실을 외면하고 마취적인 가상에 몰두하는 행위를 경멸한다는 점에서 이는 기성의 오타쿠 문화에 대한 비판과도 맥락이 닿아 있지만, 오타쿠들이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들을 -그것들에 극도로 환호하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만들어진 존재들로 받아들이며, 그 너머에 전제된 실재에 대한 의식과 선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버추얼 유튜버의 경우, 그들의 만들어진 외양 자체가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이루는 일부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버튜버의 '전생'(그들이 버튜버가 되기 이전, '자연인'으로서 남긴 행적들, 그리고 그로부터 추정된 신원 사항), '빨간약'(<매트릭스>의 유명한 비유에서 유래한, 버튜버의 '진실'에 관한 자료들)에 대한 관심은 실재-가상이라는 구획, 관계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았음을 분명히 암시하지만, 이때 실재-가상은 단순히 전자가 후자를 일방적으로 파생하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일련의 가상이 실제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후자가 전자를 성립하게 하기도 하는, 양립의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버추얼 유튜버 문화는 기성의 오타쿠 문화보다 더 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오타쿠들이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것에 비해, 버추얼 유튜버에 대한 관심은 현실의 유일한 지위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비단 버추얼 유튜버들만 버추얼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사회의 주류가 열광하는 보통의 셀럽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일정한 가상성을 띠고 있다. 대중이 그들에게 바치는 열광과 충성은 그들의 모든 인간적 면면, 자연인로서의 실재를 파악하고 그것에 감화된 끝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동경하게 된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알아가고 싶어하고 그들을 특별하고 우수하고 이질적인 존재로서 보통의 우리 자신과 구분지을 동기가 생겨난다. 실로 셀럽들이 지니는 신비감의 아우라는 그들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결함과 생물학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은폐함으로서 성립한다. 그들도 보통의 사람과 같이 추악한 욕망을 지니고 성격적인 결점을 지니고 배설, 구토를 비롯한 각종의 생리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게 먹고 마실테지만, 우리가 보는 그들의 모습들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인간적, 동물적인 측면들이 모두 누락되어 있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늙지도, 죽지도 않고 먹고 마실 때에도 근엄함을 잃지 않는 신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보여진다. 무대와 스크린 위에서 한 순간의 영원을 누리는 연예인들은 바로 그 순간에 있어서, 그 선연한 모습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로 승화한다. 가장 대중 친화적인 경우에도 연예인의 내밀한 사생활은 '자기 전시'라는 연예 사업의 본질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대중들과는 특정한 지점에서 절연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자 동물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심지어는 연예인의 서민적인 소탈함조차 하나의 의도된 연출, 과시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이질성을 이루는 요소로 가산될 뿐이다. 서민에게 소탈함은 불가피하게 주어진 삶의 양식이지만, 연예인은 스스로 소탈해지기를 선택할 수 있다.
대중들이 셀럽들에게 가지는 인식은 그들의 대외적인 페르소나, 그렇게 보여지기를 기대하고 의도하며 만들어낸 태도에 결정적으로 기초한다. 연예인의 모든 일정을 따라다니는 소수의 열성적인 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예인을 오로지 매체 안의 이미지로서 접한다. TV 화면에서, 휴대 기기의 스크린에서, 라디오 전파에서 우리는 항시 그들의 자태와 소식을 접하지만, 그 너머의 현전하는 연예인, 인간 자체를 직접 목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예인은 -마치 중세 유럽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전설처럼-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있다고 전해질 뿐인, 설화적 존재에 가깝다.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있어서, 셀럽은 그들에게 보여지는 모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돌 가수들이 건강에 대한 염려는 물론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과하게 말라보인다는 비판에 종종 직면하면서도 극단적인 저체중 상태를 활동기 내내 유지한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송용 카메라 렌즈는 인간의 눈과의 구조적 상이함에 의해서 피사체를 실제보다 다소 크고 두껍게 왜곡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아이돌 가수들은 오로지 카메라에 반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여 화면상에서 부풀어 보이지 않도록 항시 과하게 마른 몸매를 고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기획사에 캐스팅되는 과정에서 흔히 거쳐가는 '카메라 테스트'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실제의 사물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피사체로서 다뤄져야 하고 그 역할에 충실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이 어떻느냐는 것은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다수 대중이 그들을 접하는 유일한 경로인 매체상에서 그들이 어떻게 보여지냐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관해 제한된 정보만을 유통하는 것은 (노골적인 거짓 정보를 유통하는 것 만큼이나) 이미 그 자체가 가장의 한 방식이다. 엄격한 선별을 거쳐 필요하다고 인정된 정보만을 유포함으로써 속이고자 하는 자는 대상에 관하여 어떤 의도된 한 측면에 국한된 이미지의 외양을 구축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면을 쓴다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감추는 일임과 동시에, 가면이 표상하는 상징을 하나의 환상으로서 내세우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연예인들의 치열한 자기 전시는 그처럼 대중의 수요를 의식하여 선별된, 보여지기에 적합한 자기의 일부에 한정하여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 자신이 그들에 대해 보여주고자 하는 측면만을 보게 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나면, 당장에 진정성 있다는 평판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연예인의 커리어를 지탱하는 환상, 아우라는 필연적으로 쇠락해버리고 만다. 예컨대, 아이돌 가수의 열애설이 그들의 커리어에 타격을 가하는 사건과도 같이 여겨지는 건 팬들과의 유사 연애 감정, 유대 관계를 구축하여 소비층을 결속하는 특유의 비즈니스 모델에 위배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들이 다른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류의 욕망을 지니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 자족할 수 없는 그의 인간적인 취약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연애하는 아이돌은 특정한 누군가의 연인일 수는 있어도, 더이상 모두의 우상idol일 수는 없다.
각각의 필요에 의해 매개된 고유한 의미 범주를 지니고 그에 기반하여 일정한 사회적 컨텍스트를 순환한다는 지점에서, 연예인이 기호symbol라 일컬어지는 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지 않다. 그들은 그들 자신 자체이기 전에, 대중이 소환한 집단 무의식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연예인을 통해 대중은 그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 무결하고 취약성 없는 초인에 대한 상상이 체현되는 몸과 기호들을 통해 공유된다. '신성'이라는 개념의 사회적 공인이 끝난 뒤에도, 사실 상상되는 '신성' 자체는 그런 식으로 우리 곁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