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소말리 - 관심경제의 중층 결정
'병먹금'의 문제
by Writingonthewall Dec 15. 2024
관심받기 위해 일부러 욕 먹을 짓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그를 여론을 통해 단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럼으로써 그가 정확히 원하는 것을 그에게 주고 있을 뿐이다. 그를 욕하고 모욕적으로 수식할 수록, 그의 악행에 관한 인터넷 사관들의 기록이 풍성해질 수록 그는 자기의 악명을 더 효율적으로 떨칠 수 있고 추종자를 끌어모아 유명인으로서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최근 일련의 기행으로 주목받고 있는 유튜버 조니 소말리는 누구나 세상에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고 유명해질 수 있는 세태의 필연적인 산물이자, 한 전형이다. 그를 시대의 기형아인 것처럼 취급하는 주류 언론의 관점에도 불구하고 조니 소말리는 오늘날 그리 특별한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예컨대, 커맨더지코, 철구, 신태일 같은 국내의 유명 인터넷 방송인들 역시, 그들의 막말과 기행을 통해 유명세를 얻고 성공을 거둔 작자들이다.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같은 사람이라 쳐주기에도 민망한 빌런들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명실상부한 우리 사회의 유명인들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얼 했는지를 알고 관심을 두기에 분노하며 악감정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터넷의 무제한적 상호 연결성은 때로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인간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성과 결부되어, 타인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각각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불가침한 것으로 가정되는 가치와 상징에 의도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트롤troll들을 만들어내고 또 그들에게 적지 않은 성공을 가져다 준다.
이는 그러한 형태의 자기 전시가 주로 이루어지는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채널의 주 수입원이 광고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광고의 유일하면서 궁극적인 효용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노출하고 상품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광고는 긍정적인 관심과 혐오 감정을 구분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가 상품의 존재를 인지하고 잠재적 고객으로 남을 수 있는 한 광고는 유용하며 일정한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오늘날 관심은 그 대상에 대한 호감이나 직접적인 소비로 직결되는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돈이 된다. 가령, 영상이나 게시물 조회수에 일정 비율로 산정되어 제작자에게 지급되는 광고비는 실제로 개별 상품에 대해 발생한 소비, 판매에 지급되는 보상이 아닌, 상품의 노출과 군중의 주의를 끌어옴으로써 가해지는 판촉 자체에 매겨지는 비용이다.
성공적인 연예인들이 벌어들이는 때로 천문학적이기까지 한 고수입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된 이목에 의해, 그들이 효과적인 광고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언행에 관심을 쏟는만큼, 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제품을 쓰며,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또한 사람들은 연예인을 사랑하고 선망하는만큼, 언제나 그들과 모종의 공통성을 공유할 수 있기를 갈구한다. 연예인 '협찬'이 그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본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팬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연예인의 상품성을 입증하기 위해, 또 소비 패턴상의 공통 분모를 늘려 그와의 유대를 보다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필요하던지간에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인터넷 방송인들의 경우, 그들의 수입은 유튜브 조회수에 일정 비율로 산정되는 광고비나 시청자들의 도네이션(기부, 후원)에서 오는데, 유튜브 조회수에 매겨지는 광고비는 1회당 많아도 십수원, 각각의 도네이션은 대부분 1,000원, 5,000원 수준의 소액에 불과하지만, 그 소액이 수많은 시청자 및 후원자들에 의해 누적되어 큰 돈이 된다.
즉, 조니 소말리와 같은 민폐 유튜버, 또는 '크루'를 자처하는 국산 양아치 인방 조폭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받고 있음에도 간단히 박멸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활동이 대중적 공분을 자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 트위치, 유튜브의 경영진들이 숱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니 소말리와 같은 이들의 활동을 암암리에 비호하는 까닭 역시도 결국 그들의 활동이 플랫폼의 대외 이미지 실추를 감수해도 좋을 만큼의 수익을 회사에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주의력과 인지 자원을 잠식함으로써 돈을 버는 플랫폼 산업의 경제 논리에 기여한다. 그들은 모두의 이목을 끄는 화제를 만들고 사용자의 열성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하며, 산업이 원하는 활발한 상호작용의 경향을 만들어낸다.
조니 소말리와 같은 불미스러운 인간들이 자아내는 불미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은 다른 뉴스에 대해서보다 더 열광적으로 자신을 이입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소식은 명백한 악당들의 반대편에 서있는 '보통 사람들'의 도덕적 우월성, 정결함을 공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내부의 악인을 정죄함으로써 사회를 정화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단죄하고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악명을 전파하고 관련한 영상과 언론 기사를 열람하고 가능한 한 가장 모욕적인 표현을 짜내어 쓰려는 일체의 노력들이 바로 그 불미스러운 인간들의 유명인으로서의 '체급'을 키워주는 일에 불과하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어쨌든 악명이라는 것도 저명성의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이고,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똥을 싸도 박수를 받을 수 있다(사실 앤디 워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고 말해지는 세상에선 그것도 엄연한 본인의 상품 가치이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영향력은 다른 인간과 얼마나 다량의 직간접적인 연관 관계를 구축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누군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 누군가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조력을 구할 수 있거나,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저명함 자체를 스스로의 특질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에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능숙한 협상가나 정치가, 갱스터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 살인, 전쟁 개시, 핵무기 사용을 위시한 가장 과격한 옵션을 취할 수 있는 광인으로서의 악명을 미리부터 구축하여 고강도의 긴장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나간다. 상대방은 그의 평판, 다수의 공통된 인식에 근거하여 그의 말과 제스처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언제든지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인간이고, 그래서 그는 근본적으로 불가침한 대상이라 믿어진다. 즉, 공인된 악인, 광인들은 사회의 보편적인 코드를 대놓고 위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적어도 그가 무취의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평판을 획득한다. 그의 언행은 무엇이든,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별개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개 자기의 좁은 관계망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진 기질적 이상에 관한 평판에 의해 부가적인 독해의 여지와 파장을, 즉, '논란'이 될 자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가 -비록 유쾌한 방식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판단에 비추어, 그의 언행을 그 실상보다 더 과대한 맥락 안에서 파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광고주들은 공인된 빌런들의 행적에 집중된 군중의 이목을 빌어, 상품의 기획된 이미지를 손쉽게 파급할 수 있다. 민폐 유튜버들의 기행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언론, 미디어 집단들은 민중의 분노를 대변하여 자신들의 기사, 보도의 조회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이때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각각의 개인적인 호오, 나아가 대중적인 정서가 어떻느냐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좋아요'든, '싫어요'든, 유명세로 먹고 사는 이들의 세상에선 똑같은 조회수 1회일 뿐이다.
결국 주지되다시피 조니 소말리와 같은 관심병자에게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가 어떤 일을 벌이든지간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가 더이상 공개적인 기행을 통해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게 되면, 그는 그런 언행을 벌일 동기를 스스로 잃게 되거나, 적어도 누구나 그의 행적에 주목하게 됨으로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파급력은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병먹금(병신에게 먹이 금지)라는 인터넷 시대의 관용구는 역설적으로 병신에게 먹이를 주지 않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별도의 금기 사항으로 강조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병신이 무얼 원하는지를 안다. 단지 주목받기 위해, 또는 다수의 심리와 정서를 조종하는 데서 모종의 전능감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도 믿지 않는 넌센스를 자행하는 자들이 곧 병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병신에게 먹이 주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병신의 병신짓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먹이(관심)를 주지 않을 수 없게끔 정교하게 의도되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알며, 그러한 이해의 연장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훼손하고 모욕할 수 있는지를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신의 도발을, 그것이 일련의 부정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언행임을 알아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한 언행을 묵과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공격받는 상징과 가치들이 사실은 적극적으로 옹호받을 가치가 없는 것들이며, 따라서 순전히 상징적인 층위에 머무는 것임을 공인하는 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존중할만한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관한 사회적 가치 판단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태도를 통해서 체현된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으로 다뤄지는 한에서만 중요하다. 국기와 동상, 경전은 우리가 그것에 모종의 관념과 상징성을 부여하기에 단순한 사물 이상의 것이 된다. 종교적, 역사적 쟁점과 담론은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이 된다. 국기와 경전을 불태우고, 동상을 파괴하고, 역사적 사실이라 믿어지는 바를 왜곡하고, 공동체의 도덕적 규범과 세계관이 폄하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다면, 그러한 저반응은 애초부터 그것들을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일단 그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모든 '훼손'은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징과 신화, 신조는 옳고 그름의 구분, 선악의 규정, 공동체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조에 관한 믿음 체계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각각의 문화적 맥락에 소속된 개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규율하는 이념적 바탕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징 요소들이 공격 받는다는 것은 그것들에 의해 지지되는 개인의 이념적, 문화적 정체성마저도 훼손될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결코 '쿨'하게 대할 수 있는 문제일 수가 없다. 사람들이 트롤들의 도발에 번번히 의도된 면역 반응을 내어놓는 건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각자의 정체성과 도덕적 세계관의 중핵을 이루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대할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