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발언권을 갖고 공론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오히려 참여는, 대화는 무력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중요한 문제의 결정권을 나눠가지고 있기에 각자는 서로와 연관된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결론지을 수 없으며, 남과 의견을 나누고 설득을 시도하는 일은 가장 성공적인 경우에도 수백, 수천, 수억명 가운데의 하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바꾸기 위해 -그게 얼마나 작고 사소한 문제인지와는 관계없이- 그것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다른 모든 사람을 설복 시켜야만 하고 한 명의 의견과 생각은 그의 견해가 단지 그만의 것이라는 사실에서 무력하다. 그는 그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서 모든 잠재적인 반대자들에 맞서야 하지만, 논박의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무한히 논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정신력은 유한하고 언제나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날 수도 없다. 사실은 '말이 통한다'는 것 자체가 언제나 임시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인간은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관념에 대응하는 것으로 가정되며, 모종의 표상을 이끌어내는 기호에 불과할 따름이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기호로 환원된 서로의 생각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닌, 주어진 기호들에 반응하여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게될 뿐이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불가침하며 무제한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고 가정되는 각자의 '권리'는 그러한 권리가 만인을 통해 행사되고 서로의 영역을 가로질러 투사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매우 협소한 구획 안에서만 유효하다. 각자의 '자유'는 그에 대항하며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의지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서로의 자유에 의해서 제약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지만, 정확히 같은 동기에 의해서, 타인은 우리의 의욕을 거슬러 그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만 관계된 몇 가지 일을 제외하면, 타협은, 충돌은 언제나 불가피하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타인 역시도 자기의 생각을 완고하게 고수할 것임을 안다. 각자의 생각은 단지 어떤 특정의 주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그것이 연유하는 개인의 자기 규정,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념은 그 각각의 특정한 정당성의 범주, 즉,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를 규정하는 기준,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서 세계가 어떠한 모습이어야만 한다는 당위적 기대, 전망에 기초하는데, 이는 개인이 그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이상적인 자아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신념은 단지 그 이론 체계의 논리적 정합성에 의해서만 지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그가 옳다고 믿으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다. 생각을 바꾼다는 건 단순히 어떤 특정한 주제에 국한된 견해를 바꾸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생각을 만드는 사고와 실천의 원리를, 지금까지의 스스로를 만들어왔던 것들을 전복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상적 전향자들은 흔히 이전에 자기가 몸 담았던 진영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격렬한 적대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렇게 지금의 변화한 스스로를 긍정하고 과시하지 않으면, 과거의 무고한 자신을 죽이고 배반하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지난하게 의견을 나누느니, 그냥 상대방에게 죽으라고 면박을 주는 게 낫다고 말해지는 건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쟁은 이겨도 실익이 없고,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그 모멸감을 이겨내기 어렵다. 이겨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단지 패배를 면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나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동류의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관용의 미덕을 발휘하기는 어렵지만, 관용을 베풀 필요도 없는 환경을 만들기는 쉽다. 오늘날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관계를 형성하고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특별한 동기를 갖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구태여 내가 틀릴 수도, 질 수도 있다는 불안한 의심을 지니고 사느니, 각자의 반향실에 갇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이제는 누구도 진정으로 타인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외부'는 더이상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모든 교류와 소통은 오직 우리 안에 이미 정립된 생각과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것들이 나 혼자만의 고독하고 무가치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기네들만의 네트워크에 몰두하고, 광장에 나와서도 아무도 듣지 않는 구호를 공연히 외치고, 각자가 발견한 '사실'들을 오직 각자의 부족 안에서만 유통한다. 바꿀 수 없는 타인을 바꾸기 위해 애를 쓰기에,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