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생각없음의 조건

by Writingonthewall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생각을 하면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결론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가 했다는 말인데,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생각한다는 게 곧 대상뿐만이 아닌, 그 대상을 다루는 주체로서의 나 또한 객관화하는 작업이라는 걸 생각하면, 발언 자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테제이다. 생각을 한다는 건 내가 원하는 결론을 찾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는 별개로 성립하는 외부의 '이치'에 가닿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내가 기존에 믿고 있던 것, 나를 이루는 무언가를 잠재적으로 훼손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품이 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각오'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한데, 요컨대 자신을 괴롭힐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생각을 만들려면 (하드웨어적 결함이 없다는 전제 하에)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내 가설과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론을 지을 최소한의 근성이 우선 필요하고 그 결론이 내 뜻대로 도출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를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 끝에 도출되는 결론은 나의 개인적인 옳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객관적, 형식적인 정합성을 위해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용기와 근성은 역설적으로, 나를 어떤 부동의 중심점으로 인식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주변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자각에서 나올 수 있다. 자신의 어떤 일부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스로의 확신을 시험하며, 내면 세계의 안정을 깨뜨릴 위험을 감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깊이 생각할만큼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지킬 것이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내려놓을 수도 없다. 내세울만한 성취가 없고, 성취를 만들어낼 능력도 자신감도 없다.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거대한 성공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덩어리로서의 군중과 떼어놓고 볼 수 있는, 특유한 존재로 생각하게 할 수 있는 특정 영역에서의 비교 우위 자체가 없다. 자기 이외에는 만들어놓은 것이 없고, 세상에 던져넣은 것이 없다. 즉, 외부 현실과 자기 자신을 관계짓고 그 객관성을 파악할 단서가 없다. 기대를 걸 만한 잠재력, 가능성이 없고, 그래서 현존하는 '지금'만이 그들이 가진 전부이다.


그래서 미리부터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 지금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 가치관이 무너지면, 그들의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파국을 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지향은 머지않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집착이 된다. 전국 시대,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순전히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승산없는 발도 돌격을 감행했던 것처럼,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지하드(성전)에의 사명 의식에 얽매여 기꺼이 폭탄 조끼를 입는 것처럼, 지킬 것이 하나밖에 없는 인간은 과격하고 몰지각해지기 쉽다. 왜냐하면 그 하나뿐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무지성'이란 의식적인 지성의 무력함, 태만함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자아의 균열을 막기 위한 무의식적인 '절박함'의 증상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정말로 무엇이든 한다. 기꺼이 현실에 도전하고 좌절된 욕망이라는 고통의 전제를 부정하기 위해 각종의 컴플렉스와 방어 기제를 만들어낸다. 믿음을 바꾼다는 건 정체성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차라리 사실이 희생되어야 하고, 나아가 믿음과 사실의 위계는 근본적으로 재설정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믿음이 사실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믿음에 후행하고 그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믿음에 순응하지 않는 현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상에 불과하다. 그래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짜 뉴스'라는 말은 내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이 모든 것에 선행하여 확고한 전제로서 성립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이상화한 자아상을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조차 뒤틀어낸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 자신이 되기를 '선택'한다. 즉, 그 자신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바에 의해 자아의 의도와 충동은 재조정된다. 좋고 나쁨은 본성의 발현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사후의 심의를 통해 규정되고 승인된다. 다시 말해, 원해야만 한다고 여기기에 무언가를 원하고, 원해서는 안된다고 믿기에 무언가를 증오한다.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고, 자신이 설정한 이상에 스스로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실과 의욕 사이의 위험한 긴장을 중재하기 위한 '정신 승리'가 이루어진다. 당초부터 그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럴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고 불만의 가능성 자체를 은폐한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고통의 전제 조건은 우리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면, 무엇에 실패했는지도 알 수 없다. 무언가를 추구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거머쥐지 못했다는 것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승리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조건을 부인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취약한 인간성으로부터의 초월을 확인받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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