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패턴 구성, 역패턴, 카운터
프로 레벨의 복서들은 결코 보이는 그대로의 상대를 맞추기 위해 펀치를 던지지 않는다. 제한된 범위(서로의 상체 전면부)를 제한된 수단(주먹)만을 활용하여 타격하게 되어있는 종목의 근본적인 특성이 매 순간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서들은 상대의 현재 포지션에 대해서가 아닌, 다음의 포지션에 적합한 펀치를 던진다. 복서의 풋워크, 각각의 펀치는 그가 상대방이 위치하기 원하는 포지션을 이끌어내기 위해 실행된다. 그래서 복서들은 '모든' 펀치를 전력으로 던지지 않는다. 복서가 던지는 펀치의 대부분은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의 반응을 제약하기 위한 예비적인 것에 불과하다. 종종 잽이 복싱에서 가장 중요한 펀치라 일컬어지는 것 역시, 그것이 가장 빠르게, 적은 위험 부담만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공격에 대응하는 양상을 파악하고 일련의 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하는 펀치이기 때문이다.
복서들 사이에서의 수준 차이는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반응하고 그 반응에 맞물리는 또 다른 반응을 구상하는 추론의 연쇄를 거쳐 최적의 움직임을 만드는 탐색의 깊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가드를 몸쪽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바디샷을 던지고 가드를 좁히기 위해 스트레이트를 던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그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고 대응할 수 있기에 프로인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복서는 상대의 반응마저도 예측하고 자신의 움직임을 통해 상대의 반응을 의도된 양상으로 몰아갈 수 있다. 펀치를 통해 타이밍과 리듬을 장악하고 실제 겨냥되는 부분과 다른 부분을 의식해서 움직이도록 오인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펀치에 대해 상대방이 스스로 몸을 열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항상 상대의 정면에 서있으면서 프레셔를 가하고 링을 잘라먹을cut-off 수 있다. 따라서 복서의 컴비네이션은 단순한 펀치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단계(즉, 펀치)에서 상대의 불가피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의도된 포지션에서 가능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고려된 말 그대로의 조합이자 구성combination이다. 맞지 않으려고 그 모든 펀치에 반응하면 할 수록, 피격자의 가드와 포지션은 공격자의 의도된 일격에 적합하도록 조정될 뿐이다.
체스, 바둑과 같은 추상 전략 게임에서 '수를 읽는다'는 것 역시 이렇듯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상대의 대응과 그 연쇄조차도 자신의 전략적인 구상에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체스의 오프닝, 바둑의 포석은 모두 그 최초의 수순들에 대해 상대방이 취해야 하는 합리적인 반응을 전제로 한다. 즉, 서로의 착수에 대응하는 수를 내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이 의도하는 진형과 기물의 포지션을 먼저 형성하여 잠재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상식적인 예측에서 초기 행마의 이론화가 가능하다. 상대는 이미 실행된 행마에 대해 가능한 최선의 수를 두게 되지만, 그 모든 수는 이미 오프닝, 포석 이론의 체계 내에서 예견된 수이자, 앞선 행마에 의해 강요된 수에 불과하다. 상대가 그러한 수의 의도를 읽었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수를 받지 않으면, 받음으로써 미뤄질 수 있었던 파국이 더 빨리 초래될 뿐이다. 따라서 기물 하나의 움직임, 돌 하나의 착수로 이후의 수십 수순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지가 정해진다.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게 되는지가 정해지면,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이른바 정수正手라는 건 단지 매 국면에서 자신에게 가능한 최선을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상대의 행마를 자신의 행마에 종속시켜 제한하고 상대방의 악수를 강제Zugzwang하는 것이다.
모든 훈련의 핵심은 (의식적인 사고가 끼어들면 비효율적인 지연이 발생할 수 있기에) 각 상황에 대해 적합한 움직임을 반복을 통해 체화, 숙달하여 필요할때 자동적인 반응이 출력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00마일 구속의 공을 때려내고 르브론 제임스의 드라이브 인을 막아내는 일을 매번 생각하면서 할 수는 없으니, 상황마다의 자동화된 루틴을 만들기 위해 훈련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훈련되어 있다는 것은 상정된 상황에 대해 어느정도는 경직된 반응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서, 영리한 코치, 플레이어들은 종종 상대방의 훈련된 움직임을 역이용하여 우위를 점한다. 농구에서 유로 스탭euro step은 단지 볼을 소유하고 걸음마다 방향을 전환하면서 전진하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개인기이지만, 공격자의 퍼스트 스탭의 방향을 의식해서 움직이게 되어있는 수비자의 체화된 본능을 오인시켜 잘못된 경로를 수비하게 만듦으로써 효과적인 공격 수단일 수 있다. 풋볼에서의 creeper 또는 simulated pressure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이 패스 러시pass rush에 참여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프론트의 형태를 말하는데, 실제로 플레이가 개시되면, 평상시의 4-men rush에서와 같이 7명의 수비수가 드롭백 하면서 패스 커버리지를 형성한다. 이때 상대 쿼터백이 가장된simulated 프레셔에 반응하여 패스 수비의 밀도가 옅은 실제의 프레셔 상황에서처럼 공을 빠르게 처분하려 하면, 플레이는 예상 밖의 패스 커버리지에 가로막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stunt는 마찬가지로 풋볼에서 수비 라인맨들이 본래 각자 위치하고 담당하는 곳과는 다른 gap을 공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잘 설계된 stunt는 상대 공격 라인맨이 자신의 통상적인 위치에 머물며 누구도 공략하고 있지 않은 gap을 수비하게 하고 하나의 gap에서 두 명 이상의 러셔를 감당해야 하는 과부하를 초래하거나 평소와 다른 gap을 향해 움직이는 자신의 마크맨을 쫓아 비효율적인 동선을 택하게 함으로써 추가적인 패스 러시 인원 투입없이도 포켓에 순간적인 균열을 만들고 어느 누구의 블락도 받지 않는 free-rusher를 만들어낸다.
격투 게임이 다른 게임들보다 유독 어렵고 높은 진입 장벽을 가진 이유는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상대방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빠른 조작 입력으로 대응하는 피지컬적 요소의 비중이 높아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격투 게임 업계가 지금처럼 다른 종목 같았으면 진작에 은퇴했을 고령의 게이머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고인물'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격투 게임이 어려운 이유는 피지컬적 요소의 비중보다도 각각의 동작을 실행함에 있어 필요한 커맨드와 자신과 상대방이 매 순간의 국면마다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를 숙지하고 상황마다의 적시에 조작을 입력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게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할 줄은 아는 수준으로 플레이하는 데에만 상당량의 경험치와 반복 숙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격투 게임에서는 모르면 맞아야 한다. 상대의 패턴을 모르면 어디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맞아야 하고, 상대가 걸어오는 기술의 프레임 수, 상중하, 호밍 판정, 막으면 얼마만큼의 프레임 이득을 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항해서 어떤 기술을 걸어야 공격자에게 판정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와 같은 테크니컬한 사항을 알지 못하면 그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절한 대응을 구상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맞아야 한다. 단지 보이는대로 반응하고 상대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응하기만 하면 상대의 움직임에 종속되어 끌려갈 수밖에 없고, 직감적, 자동적인 움직임으로는 그러한 움직임 자체가 그때마다의 구도와 상황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유도되어 나온다는 점에서 상대의 예측을 넘어설 수 없다. 무릎, 아슬란 애쉬와 같은 게이머들의 탁월함은 단지 상대의 공격에 직관적으로 반응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피지컬적 이점에만 기초하지 않는다. 훌륭한 복서들이 그러하듯이, 훌륭한 격투 게이머들의 탁월함 또한 상대의 패턴을 예측하고 그 결점을 착취하는 역패턴을 구상하는 능력에 결정적으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