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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Nov 05. 2020

스무 살에 평생 금주 다짐한 이유

술과 판단의 늪을 넘어가기까지, 그리고 세상에 바라는 것


'너는 왜 술 안 마셔?'

'쌤은 MT 안 가봤어요?'

'교회 다녀도 마시는 사람 많던데?'


 친구들, 혹은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나에게 종종 던지는 말들이다. 학원에서는 아직 10대인 학생들조차 나에게 왜 술을 안 마시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글쎄, 굳이 답해보라면 금주의 이유는 술을 마시지 않는 쪽이 마시는 쪽보다 유익하다는 계산을 해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논리가 나의 중심에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금주를 다짐하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관점"에서 술이 어떤 녀석인지, 그리고 필자는 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며 이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참고로, "금주"라고 표현했듯이 나는 술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10대 때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 권할 때 홀짝홀짝 마셔봤고, 그리고 스무 살이 된 해의 1월 부산여행 중에 캔맥주를 마셔봤다. 기억이 맞다면 같은 해 중학교 친구들과도 마셔본 것 같다.





술이 무엇인데 사람을 흔드리이까?


 예부터 우리 문화는 술을 즐거움, 풍류와 연결하곤 했다. 한국사 책과 삼국지 등 동양권의 기록을 보면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무신들은 보초를 서며 힘들어하는데 문신들은 술 잔치를 벌이며 시간을 죽였다는 일화나, 적장이 취한 틈을 타서 목을 베었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그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


 <술=즐거움, 술=재미> 공식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나이가 아닌 연도로 음주 가능한 연령을 분별하기 때문에 12월 31일 밤에는 1월 1일이 되면 곧장 술집에 들어가려 하는 19살들을 볼 수 있다.


 스무 살부터의 풍경은 어떠한가. 내가 1학년 때 마주한 캠퍼스는 마치 'Alcohol is best'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고등학생 때까지의 음료는 기껏해야 사이다와 콜라가 끝이었는데, 낮이나 밤이나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술병과 술잔이 낯설었다.


 술이 가져다주는 힘과 분위기는 굉장히 대단했다. 필자가 아직 대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학과에서는 선배들이 예비 신입생을 모아 이모저모 이야기를 해주는 비공식적 시간이 있었다. 약 40명 정도가 학교 후문가의 포차로 들어갔는데, 선후배가 조금씩 술을 나누며 텐션이 올라가는 것을 실감했다. 그 당시 내가 속한 테이블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는데, 이웃한 테이블에서는 거의 노래방 수준의 음량으로 술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그때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충격받은 것은 대학교 축제 후 귀갓길이다. 초대가수 싸이의 공연이 늦게 끝나 밤 12시가 넘어버렸고, 집으로 돌아올 환승 지하철이 끊긴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 어플을 깔고 대기 중에 있었다. 근처에는 보이는 모습들은 내 또래의 학생들과 아버지 연배의 회사원분들이었는데, 이들이 내게 조금의 충격을 주었다. 학생들은 편의점 앞에 누워 술병을 갖고 놀고 있었고, 회사원들은 볼이 조금 붉은 상태로 자신들의 양복을 세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자정을 넘긴 것도 처음이었는데, 그 어두운 밤에 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내게 조금의 충격을 주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필자는 기독교이고, 스무 살이 되기 직전부터 교회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독교가 술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종교가 없는 친구들도 몇몇은 알고 있는 성경 구절 "술 취하지 말라"도 모르고 있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에베소서 5:18, KJV)


 한 번은 교회 집사님께서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식사 자리 중에 질문을 하셨다. 앞으로 대학이나 직장에서 술자리가 있을 터인데 그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질문에 "되도록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만 마시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집사님은 나를 교회로 인도한 학교 선생님이었기에 내가 대학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확실한 결의를 해내기를 바라시고 계셨을 거다. 선생님은 그런 자리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을 애초에 제거해두라고, 술은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때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 아하, 기독교는 술을 싫어하는 입장이구나.


 그렇지만은 않았다.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한 나는 수십 명의 크리스천들을 만나보았는데, 술을 즐겨 마시는 학생도 있었고 좋아했다가 끊은 사람도 있으며, 절대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한 선배는 예수님도 술을 마셔본 적이 있다며 술을 마신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신입생 친구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여부는 믿음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영역임을 인정하게 됐다.


 나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있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가끔가다 술을 마실지,
아니면 평생 마시지 않을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보았다. 철저하게 공리적인 발상과 금전적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일종의 비용-편익 분석을 한 셈이다.


 술을 거절할 때 학교와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우려되기도 했다. 보통 술자리를 통해서 친해지고,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술을 통해 접대하는 문화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초점을 둔 것은 술을 마실 때 잃는 것들이었다. 금전적인 비용은 물론이고, 술을 지속적으로 마심으로 인해 미래에 건강이 무너지는 것도 계산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사고의 위험이었다. 술에 취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위험이 가장 무서웠다. 혹시 몰라하게 될 음주운전이 싫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련의 생각을 거친 뒤에 나는 평생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술보다 무서운 판단의 늪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음에도 내게는 치명적인 증상이 나타났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이유를 찾아 결심한 것뿐인데,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깎아내리게 되었다. 술로부터 안전하다는 이상한 우월감에 빠져 타인을 예단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이웃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인데, 사랑해야 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오만에 빠져버린 것이다. 올바름을 위해서 금주를 선택했건만, 술보다 더 무서운 판단의 늪에 빠져버렸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죄에 빠진 것을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치료할 수는 없었다. 다시 같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그 답을 다시 성경에서 찾을 필요가 있었다. 기도를 통해 내 마음속의 죄는 태워버렸지만, 내가 새로운 마음가짐을 준비하지 않으면 다시 남들을 판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 KJV)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구절을 다시 읽어보았다. 크리스천에게 너무도 당연한 문장이지만, 나는 이 구절을 다시 묵상함으로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인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든, 술을 마시는 사람이든 똑같은 사람이다. 똑같은 죄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이유도 없으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 네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라. (로마서 2장 1절, KJV)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마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결심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겠다고 말이다. 문제가 술이든 무엇이든, 남을 과의식하는 모든 것들이 무익하다는 것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이후에는 내 친구가 술을 마시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칠 정도로 과음하지도 않거니와, 술을 마심으로 즐거움을 누린다면 나에게는 그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블로거 초대권을 얻어 친구들과 초밥을 먹으러 갔는데 한 친구가 맥주 한 잔이 당긴다고 하더라. 그래서 술을 포함해 식사를 대접했다. 술이라면 판단부터 앞서던 내가 흔쾌히 술을 사 준 신기한 순간이었다. 그때 마음에 어떠한 미움도 들지 않는 나를 다시 바라보며 판단의 늪을 극복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것들.


 술을 마시냐 마느냐는 사실 개인의 영역이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술의 과도함을 이기지 못하는 시점부터이다. 내가 가장 경계한 것은 사고의 위험이었다. 자제력을 잃어 벤틀리 차량을 발로 찬 그 정도의 사건 말고, 음주 운전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일들 말이다. 술을 하도 마셔서 토하고 숙취로 고생하는 것은 괜찮다. 어차피 그 사람 한 명분의 힘듦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유튜브 한문철 TV-6840회 영상 중


 한문철 TV-6840회. 공론화시켜주십시오.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낸 이 가해자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엄중한 처벌을 받길 간곡히 바랍니다.


 술에는 죄가 없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이 큰 사고를 내어 화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되면 너무도 슬프다.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이는 일부 연예인, 크리에이터들도 술에 넘어져 추락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혹시 술 반 잔 마신 정도로는 운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에게 정말 사랑스러운 7살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길을 건너다 음주 운전자에게 치여 하늘나라로 갔다고 상상해보아라. 그때에도 음주 운전이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뭐 가끔 마셔.'

'나는 음주 운전 절대 안 해. 대리 불러야지.'


 본인이 잘 지킨다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지키었으면 좋겠다. 몸속 신호등이 노란 불이면 빨간 불로 넘어가기 전에 그 술잔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음주가 부디 즐거움에서 끝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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