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라는 것은 상대를 신경에서 삭제하고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대방을 적당한 선에서 인식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라도 상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위치, 바로 그쯤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된다. 이 바운더리가 명확하고 잘 지켜진다면 인간관계로 인해 무너지는 일은 지금보다 덜할 것이다. 나의 몫과 남의 몫이 무엇인지 늘 기억한다면, 그리고 상대방도 과제의 분리를 충실히 해내고 있다면 무의미한 충돌은 적어질 것이고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할 것이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아들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의 과제와 남의 과제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글에서는 아들러의 "과제의 분리"가 무엇인지, 분리를 해냄으로써 어떤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는지를 설명해보려 한다.
과제의 분리 : 나의 과제와 남의 과제의 분명한 인식
나의 과제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남의 과제는 남이 해야 하는 일이다. 과제의 분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둘을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신의 과제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 과제의 동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타인의 기대로 인한 것인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어떠한 과제가 "나의 과제"라면 그 과제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특징을 가진다.
1. 과제는 자신의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2. 다른 사람은 이 과제를 침범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교실 속 이야기를 샘플로 들어보겠다. 이제 곧 시험시간이 다가오는 주간이라면 학생들은 조금씩이나마 보지 않던 책을 챙겨보고, 문제집을 풀며 가까워진 시험을 준비할 것이다. 공부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 성적을 올리려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공부"는 "학생"의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나 칭찬을 목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학생의 과제가 아니다. 일의 동기가 자신의 바깥에 있을 때는 자신의 과제라고 볼 수 없다. 공부가 학생의 과제이기 위해서는 학생의 공부가 타율이 아닌 스스로의 자율성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번에는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의 시점으로 살펴보자.
부모는 애가 탄다. 시험기간이 코앞인데 문제집에는 손을 대지도 않는 아이를 보며 걱정이 쌓인다.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입을 연다. 언뜻 보면 아이의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부모로서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은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부모의 "공부 좀 해라."는 과제의 분리에 실패한 완벽한 예시가 된다. 이때 부모는 "나의 과제"의 특징 2번 : <다른 사람은 이 과제를 침범할 수 없다.>를 어겼다.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신의 과제를 넘어 아이의 과제에 침범한 것이다. 잠깐, 부모 연령대의 독자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 아니, 공부하라고 말하는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내 자식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부모로서 아이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단 말이야?
- 공부하는 건 학생의 몫이 맞지만, 애가 공부를 안 하면 언질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어? 타이르는 건 부모의 몫이잖아.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도서 [미움받을용기]에 등장하는 철학자는 위와 같은 반문에 더 강한 반박으로 맞대응한다.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부모의 과제는 <자식이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도움을 청할 수 있으므로 도울 수 있는 위치에서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필자의 어머니는 나의 학창 시절 때 공부가 학생의 과제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끔 기다려주셨고, 나는 공부가 "나의 과제"임을 인정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부모의 권위나 강제성이 개입되지 않았다. 즉, "공부"라는 과제를 두고 부모와 학생이 조화롭게 과제의 분리를 해낸 셈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이 과제의 분리인 줄도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주 적당한 과제의 분리였음을 알게 된다.
과제의 분리의 다른 예
앞부분에서 공부라는 소재를 가지고 부모와 아이의 과제의 분리를 설명했다. 원래부터 과제의 분리를 잘 해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했을 것이고, 과제의 분리 개념을 막 접한 독자들은 아직은 헷갈릴 것이다. 그래서 이 아래로는 과제의 분리를 적용하고 있는 일상 수준의 예를 소개하려 한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선물을 주는 사람의 과제는 "선물을 준비하고 상대에게 주는 행동"까지 이다. '나는 너한테 선물을 주는데, 너는 뭐 없어?'라든가, '내가 이렇게 좋은 걸 준비해줬는데, 넌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라는 물음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선물을 받은 상대방의 몫이기 때문이다. 상대한테 무언가를 바라고 주는 선물은 애초에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선물이 아니다. "나의 과제" 특징 1번 : <과제는 자신의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를 기억하자. '내가 선물을 줬으니 너는 출력 값으로 감동하는 티를 내!'라는 심보는 말이 안 된다. 선물에 느낄 감정은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상대의 몫이다.
먼저는 잘 연락하지 않는 친구를 대할 때
단톡 방에서 말수가 적고, 평소에도 연락이 없는 친구에게 조금은 서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친구를 억지로 모임에 끌어오거나 약속을 잡도록 유도하는 것은 안 된다. 그 친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않는 모습은 그 친구가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자유이다. 우리에게는 상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어떻게 억지 노력을 발휘하여 친구를 식사 자리에 데려왔다고 해도, 친구가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의미 없는 식사가 될 것이다.
회식이나 모임을 제안하지만, 늘 자리를 피하는 사람을 대할 때
'아, 저 대리님은 좀 까칠하네. 매번 같이 먹자고 제안하는 데 왜 항상 거절하시는 거지? 우리랑 같이 있는 게 부담스러운가?'
이것도 위 친구 사례와 마찬가지다. 식사를 제안하는 것, 딱 거기까지가 우리의 과제이다. 그 제안을 수락할지, 거절할지는 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통일성과 친목을 들이대며 자꾸 묶으려 하면 과제의 분리는 실패로 달아난다. 과제의 분리는 상대와 멀어지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선에서 서로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애완견을 대할 때
과제의 분리는 인간 대 인간에서 출발한 개념이지만, 강아지처럼 인간과 충분한 교감이 되는 동물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만일 강아지가 주인이 챙겨준 밥을 먹지 않는다면, 먹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먹지 않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강아지는 속이 안 좋아서 밥 먹기를 거부 중인 걸 수도 있고, 단순히 졸려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몇 가지 예시가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이 외에도 각자의 삶에서 과제의 분리를 마주할 기회는 굉장히 많을 것이다. 특히 사회생활에서는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의 몫은 상대에게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자. 인간관계는 단순히 업무뿐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얽힌 문제이다.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감정은 사람마다 달리,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달리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잣대로 저 사람의 반응까지 함부로 예측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라는 것은 상대를 신경에서 삭제하고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대방을 적당한 선에서 인식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라도 상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위치, 바로 그쯤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된다. 이 바운더리가 명확하고 잘 지켜진다면 인간관계로 인해 무너지는 일은 지금보다 덜할 것이다. 나의 몫과 남의 몫이 무엇인지 늘 기억한다면, 그리고 상대방도 과제의 분리를 충실히 해내고 있다면 무의미한 충돌은 적어질 것이고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할 것이다.
과제의 분리는 순수한 이기도 아니고 순수한 이타도 아니다. 자신의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목표에 충실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면이 있으며,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기다려준다는 의미에서는 또 이타적인 면이 있다. 과제의 분리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 역시 무리이다.
즉, 과제의 분리도 상황에 따라 사용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필자는 과제의 분리를 처음 알았을 때, 상대방을 믿어주고 기다린다는 점, 관계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곤함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모든 순간에서 과제의 분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는 남의 과제임에도 뛰어들어야 할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 장애가 있는 사람의 집에 불이 났다면 과제고 뭐고 일단은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의 과제는 여기까지이다. "과제의 분리"를 설명하고 나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 딱 이 바운더리까지가 나의 과제였다. 이 도구를 쓸지 말지, 쓴다면 언제 써야 할지 판단하는 몫은 독자의 과제이다.
다음화 미리 보기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병법을 인간관계에 그대로 가져오면 큰 낭패를 본다. 인간관계는 몇 가지 전략으로 정해진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감히 상대방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인생에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순간이 태반이다. 하물며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상대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모른 채 남의 인생을 함부로 추측하고 지레짐작으로 채워 넣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 생각 나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슬로건이 사회를 두른지도 벌써 꽤 되었습니다. 저는 위 슬로건이 참 마음에 듭니다. 마음이라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만약 코로나와 유사한 바이러스가 핸드폰 하나 없던 100년 전에 발발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마음은 가까이"라는 슬로건의 핵심은 적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서울 어딘가를 걷다가 이런 문구도 보았습니다.
"징검다리는 서로 떨어져 있음에도 다리를 이룬다."
멋진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코로나와 연결 짓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합리적인 거리를 설명해주는 문장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상처가 오가거나 힘들었던 적이 있지 않았나요? 이 글에서 소개한 "과제의 분리"는 상대방과의 적당한 선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암묵적이지만 본인이 정하고 있는 바운더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노크도 없이 그 바운더리를 침범하면 남을 경계하게 되죠. 심지어는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선을 함부로 건드리면 피곤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목마른 사슴을 물가로 데려다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물을 먹이도록 억지로 그의 고개를 눌러줄 필요까진 없습니다. 몸을 구부려 물을 마실지는 사슴이 선택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거동이 어려워 보인다고 무작정 찾아가 밀어줘서는 안 됩니다. 그가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돕는 것이 더 이롭습니다. 나는 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밀어준다면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과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택과 자유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떠오르네요. 이들과 연결되는 부분은 다른 페이지를 열어 글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본문에 이어 이 단락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