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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Nov 23. 2020

상대의 전부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오만과 편견을 멈추고 겸손과 믿음을 시작하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병법을 인간관계에 그대로 가져오면 큰 낭패를 본다. 인간관계는 몇 가지 전략으로 정해진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감히 상대방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인생에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순간이 태반이다. 하물며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상대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모른 채 남의 인생을 함부로 추측하고 지레짐작으로 채워 넣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아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는 무엇인가를 알아간다는 건 대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여 머릿속에 저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동물과 구별되게 우리 사람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는 축복을 받았다. 앎의 즐거움은 대단하다. 인간은 알고 배워감에 따라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되며, 꿈과 이상을 품고 살아간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 각각은 인생의 경험치를 쌓아가며 성장한다.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지식으로 머리를 키운다면, 다른 사람과의 시간으로 쌓은 지식은 인생의 지평을 넓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관계를 통한 배움이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자기 이해>와 <타자 이해>가 모두 중요하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근차근히 공부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타자 이해>와 관련된 부분을 나누고자 한다. 하지만 새 내용을 들어가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사람을 안다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정해져 있다."



 이 장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음 두 문장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인간관계를 위해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다만, 상대방의 전부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전부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이전에 <믿음의 끈.> 글에서 다룬 인간관계 모형 1번과 2번을 기억하는가? 1번은 우리가 남을 막 알았을 때이고, 2번은 서로에 대한 지식과 신뢰가 쌓여 믿음의 끈이 튼튼해진 상태였다. 1번과 2번을 구분 짓는 것은 "서로 상대를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였다.


 사람들은 보통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게 되는데, 취향이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친밀도가 크게 증가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친해진 순간들을 기억해보자. 이야기를 나눠보니 똑같이 축구를 좋아한다든가, 떡볶이를 좋아한다든가,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든가- 서로 공통된 취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유독 빠르게 친해지지 않았던가?


 반면, 사람들은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는데 이때의 주원인은 오해와 갈등이다. <믿음의 끈.>에서 3번 그림이 관계 악화에 해당되었다.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볼 주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한 번 더 원인 탐구를 해보자. 왜 오해와 갈등이 시작되는가? 필자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의 전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각은 자신만의 영역을 갖고 있다. 이 영역은 마치 훌라후프처럼 한 사람을 감싸고 있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자신의 원을 겹치는 과정이다. 우리는 두 원이 겹쳐지는 면적만큼 서로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분위기, 관심사와 같은 가벼운 것들을 알게 되는가 하면 나중에는 서로의 인생관, 가족 환경처럼 깊은 주제를 나누어 알게 된다.


 하지만 상대의 전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가까운 두 사람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훌라후프가 완전히 겹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를 잘 알아, 나는 그 친구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라며 단언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소꿉친구라도, 베스트 프렌드라도, 함께 수십 년을 살아온 배우자라 해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는 남의 인생을 멋대로 예단하고 쉽게 단정 짓는 경향이 자리 잡았다. 본인이 살아온 인생에는 후한 값을 매기지만, 남들이 걸어온 길들에는 그리 후한 값을 주지 않는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마찰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상대에게 "질려버림"을 느낀다. 영상 플랫폼들의 댓글창들만 보더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모습을 아주 잘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의 발화에 어떤 뜻이 있는지 깊이 있게 생각하기 이전에 나와는 다른 생각을 지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판단해버린다. 이것은 일종의 오만함이다.


 위와 같은 오만함이 누적되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균열이 생긴 상황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나를 제외한 사람을 모두 경계하고 거리감을 두는 편견의 늪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타인을 배척하는 태도가 지속되면 그 사람은 머잖아 고립될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사회성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병법을 인간관계에 그대로 가져오면 큰 낭패를 본다. 인간관계는 몇 가지 전략으로 정해진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감히 상대방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인생에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순간이 태반이다. 하물며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상대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모른 채 남의 인생을 함부로 추측하고 지레짐작으로 채워 넣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겸손과 믿음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이 매거진의 첫 글 <가치의 다름을 이해하기.>에서 "다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이미 언급을 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기본값은 "다름"이었다. 아래 단락부터는 그 기본값 위에 쌓아야 할 태도를 적어보려 한다.


 제인 오스틴은 그의 작품 <오만과 편견>에서 오만은 남들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편견은 내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 페이지에서는 <오만과 편견>과 대비되는 개념인 <겸손과 믿음>을 소개한다.


 겸손은 나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겸손은 이전까지 가져왔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타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내가 아무리 상대에 대해 공부를 한다 해도 그의 전부를 알 순 없지.' 하며 말이다. 우리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스스로의 부족을 인정함으로써 상대를 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믿음은 판단, 지레짐작과 반대된다. 믿음은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추측으로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의 믿음을 통하여 갈등을 예방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시작할 수 있다. 좀 더 확장하자면, 믿음은 나와 다른 부분에 대한 이해심과 존중을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이 글의 독자들은 도덕이라는 명목 하에 겸손과 믿음을 이미 배워 그 둘의 언어적 의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둘의 의미를 계속하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 둘은 스스로의 인격 성장에 도움을 주며, 관계 형성과 개선에도 건전한 영향을 준다. 이 둘을 실천하면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들에 주목해보자.


상대방의 행동을 멋대로 오해하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상대가 부탁과 다르게 일처리를 했을 때 실망하거나 분노를 겪는다. 하지만 한 스텝 멈추고 생각을 해보자. 상대가 그렇게 일처리를 한 것은 그 사람의 능력 부족 탓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까지 기다려보자. 남을 꾸짖고 갈등을 키우는 것보다는 상대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태도가 훨씬 바람직하다. 이 믿음으로 인해 상호 간에 신뢰가 쌓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이 생길지도 모른다.


걱정을 내려놓아 스트레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상대방을 잘 모를 때, 서로 신뢰가 쌓이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내가 요청한 것을 상대방이 잘 이해하고 해 줄까?', '이 사람, 또 약속 시간에 늦는 거 아냐?' 하며 섣부른 걱정을 하지 말아라. 걱정한 것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의 시선을 갖고 지금 내 앞에 놓인 과제만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면 된다.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에 차질이 생기면 누군가의 책임을 묻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책임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냐, 저 사람 때문이야.'라며 책임을 물어줄 남을 찾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임 질 사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겸손함을 기억하고 발휘하자. 만일 문제가 발생한 부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점을 인정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잘못을 회피하는 사람보다 과오를 인정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족에 대한 빠른 수용은 개선할 영역을 찾아줄 것이다.






 겸손은 남들이 나를 사랑하게 하고, 믿음은 내가 남을 사랑하게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겸손과 믿음을 겸비한다면 다른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은 매끄럽게 이어질 것이다. 이 태도는 내가 남을 이해하는 과정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의 태도가 다른 누군가를 사로잡는다면 그 사람도 당신을 알고 이해하기를 원할 것이다. 즉, 여기에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게 볼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일석이조의 장점이 있다. 이 태도를 기저로 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이 더해진다면 인간관계의 지경과 깊이는 긍정적인 쪽으로 바뀔 것이라 믿는다.





이전 글: <과제의 분리.>


다음화 미리 보기


 그러므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무조건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보다 잘 나가는 사람과의 비교도, 자신보다 못 나가는 사람과의 비교도 결코 유익이 되지 않는다. 비교함으로 재미를 보거나 일시적인 위로는 느낄 수 있을지언정, 긍정적인 변화나 개발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저것 생각 나눔]


 이 글의 핵심은 "상대방의 전부를 알아낼 수는 없다."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여전히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미지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었고, 보다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겸손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적어두었습니다. "겸손과 믿음"은 이상적인 가치입니다만, 매 순간 실현해내기에는 어려운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사회의 온도는 한 층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로를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쓸 수 있을까요? 본문의 "겸손과 믿음"이 우리의 태도를 위한 조언이었다면, 상대와의 관계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대화"입니다. 오로지 "솔직한 대화"만이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높여주고 믿음의 끈을 튼튼하게 바꿔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겸손과 믿음을 쓰는 것만으로도 페이지가 길어져서 "대화"까지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한 글은 시간이 흐른 뒤에 연결하여 쓸 생각입니다.


인간기저론

 

 이 글을 기록함으로 [인간기저론] 매거진에 5편의 글이 담겼습니다. 이쯤에서 매거진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남겨볼까 합니다. 이 매거진이 기본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인간관계"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쌓인 경험과 생각들을 녹여 글을 내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름은 "인간기저론(人間基底論)"으로 정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일들이기에 "인간"은 꼭 들어가야 했지요. 하지만 인간관계론이라는 이름은 쓸 수 없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유명한 책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쓸 내용을 잘 묘사하고 있는 단어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며칠의 고민 끝에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공업수학 교재였습니다. 그리고 이 수학책에서 "기저(Basis)"라는 단어를 찾았죠. 본디 수학에서는 원소의 모임을 기저로 설명하는데, 집필하게 될 내용들이 꼭 이 원소들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매거진(집합)에는 세상살이를 위해서, 인간관계를 위해서 알아두면 좋을 법한 이야기들(원소)이 담길 것입니다. 기저가 튼튼한 건물은 쉽게 무너지지 않듯, 이 글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세상에서 굳세고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믿음의 끈.>


 본문에서는 이전 글인 믿음의 끈을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의 끈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생기는 끈입니다. 이 끈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모양이 변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하기 원하시는 독자분들은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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