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넷, 기혼, 문과 출신인 내가
내가 미국으로,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하러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해했다. 어리둥절의 원인은 1) 내 프로필에서 예상하기 어려운 결정이거나 2) 데이터 사이언스가 정확히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둘 다.
이제 미국에 온 지 4주 정도 되었다. 언제나 큰 일을 저지르고 난 뒤 며칠, 몇 달 뒤에야 내가 일을 벌였다는 걸 깨닫는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현실감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 몽롱한 상태로 아파트도 구하고, 중고차도 사고, 수업도 시작했지만. 지금 내가 학생 신분으로 미국 남부의 어느 대학교 도서관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지금 느끼는 신선함, 감사함이 사라지기 전에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유학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커리어 변천사와 궤를 같이 하는 이유는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기 전 나는 4개의 회사, 3개의 포지션을 거쳤다:
광고 대행사 - 광고 기획 (TV, 라디오, 인쇄 매체)
IT 컨설팅펌 - 컨설팅 (주로 디지털 마케팅 관련 프로세스 컨설팅)
모바일 광고 매체사 - 세일즈
리타겟팅 광고 매체사 - 세일즈
크게 보면 광고를 중심으로 한 마케팅의 영역에서 1) TV 광고 같은 컨텐트를 만드는 일 2) 컨텐트나 기타 브랜드 자산(예: 웹사이트, 모바일 앱)을 확산하는 광고 매체를 파는 일 - 두 가지 일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회사와 포지션을 옮긴 것은 '이것저것' 해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일을 하면서 가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나를 새로운 회사, 새로운 포지션으로 이끌었다:
'내가 만든 광고가 정말로 매출을 높이는데 기여할까?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언제 즘 기여할까? 광고 말고 매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뭘까?'
' 광고주가 광고 카피에 A라는 단어를 꼭 넣자고 하는데, A가 카피에 들어가면 멋이 없는 것 같고.. 어떤 카피와 비주얼이 더 나은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요즘 사람들이 우리 광고주 브랜드를 엄청 욕하고 있는데 이 브랜드 정말 멋있다는 거만한 메시지로 광고를 하면 사람들의 호감도가 오히려 더 떨어지지 않을까?'
'왜 어떤 모바일 앱은 죽어라고 앱 인스톨 광고를 해도 진성 유저가 늘지 않는데, 또 어떤 앱은 광고를 안 해도 사람들이 입소문까지 내면서 열심히 쓸까?'
나의 이런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객관적인 근거, 과학적인 측정,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한 개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TV 광고를 본 뒤에 소비자의 머리 속과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광고에 어떤 메시지를 광고에 담아야 하는지, 광고비로 얼마를 써야 하는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특히 내가 광고 대행사에서 맡았던 광고주는 자동차 회사였고 내가 일하면서 들은, 한국 소비자의 평균 자동차 구매 주기가 7년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막 K3를 산 사람에게 K5 광고를 보여주어도 구매 결정은 5년 이상 지난 다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관여도가 자동차보다 낮은 식음료, 화장품 등은 광고와 매출의 상관관계가 크겠지만 그 역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영향을 얼마나 미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반면 디지털 매체는 광고에 대한 반응과 광고를 본 소비자의 프로파일을 파악하는데 훨씬 용이했다. 특히 나의 갈증을 가장 많이 채워준 회사는 마지막에 다닌 리타겟팅 광고 매체사였다. 이 회사는 '광고를 통한 매출 극대화'를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1) 가장 구매 확률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내서 이 사람들을 위주로 광고를 보여주고 2) 광고 배너에서 이 사람들이 가장 살만한 상품을 개인화하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겟팅과 추천 상품 선정은 사람이 관여하지 않는 자동화된 프로세스였다. 더불어 어떤 배너 템플릿이 클릭과 구매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지, 사람들이 웹사이트에 들어와서 제품을 본 다음에 며칠이나 있다가 구매를 하는지, 그 결정 과정에서 몇 개의 경쟁사 웹사이트를 방문하는지 등등을 알 수 있었다.
두 곳의 온라인 광고 매체사에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광고 상품을 파는 일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질문들에 답해줄 수 있는 멋진 도구와 방법을 찾았다. 데이터,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들, 데이터를 처리하는 인프라스트럭쳐 - 어떤 광고를, 누구에게, 언제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와 과학적인 측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주체들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지 파악하려면 데이터를 수집, 처리,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광고와 마케팅에 분석된 결과가 반영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실시간으로, 자동으로. 준중형 자동차 구매를 고려하는 사람에게는 K3 광고를 보여주고, 중형 자동차 구매를 고려하는 사람에게는 K5 광고를 보여줘야 하며, 당장 차를 사려는 사람과 향후 2~3년 내에 차를 살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달라야 한다.
광고 매체사에서 세일즈 포지션으로 광고주, 광고 대행사에게 광고 상품을 파는 일도 재밌고 보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그 상품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마케팅을 하고 싶고, 브랜드 경험을 만들고 싶다. 다만 고차원적인 마케팅/브랜드 전략이나 크리에이티브 중심의 광고, 마케팅 캠페인이 아닌,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개선하고 싶다. 데이터라는 도구를 가지고.
내가 다룰 대상은 온라인 광고, 소셜 미디어, 게임처럼 온라인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상품일 수도 있고, 우버나 에어비앤비처럼 오프라인에서의 경험과 온라인이 합쳐진 플랫폼일 수도 있고, 자동차나 에너지처럼 딱 봤을 때 데이터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전통적인 산업군에서 만드는 새로운 무언가 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소비자들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해결해야 한다는 마케팅의 기본 전제가 TV 광고를 만들 때나 최신 테크놀로지로 나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모바일 앱을 만들 때나 변함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알고 싶다. 1년 반 동안 데이터 사이언스에 대해 관념적으로, 기술적으로 접근하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나의 미션은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