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한 일 중에 가장 끔직한 게 뭔지 아나……? 우리를 구원한다고 자기 아들을 희생한 거요. 자기 아들 말이야! 자기 아들……! 잔인함, 그게 바로 하느님의 첫 번째 속성이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위폐범들>의 대미에 나오는 대사이다. 당대에 지드가 대표적인 반(反)가톨릭 작가인 만큼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내뱉은 이러한 인식이 새로울 건 없다. 기독교에선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를 통해서 계시한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시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지드에게선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잔인함의 증거가 된다. 물론 그 잔인함이 인간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위한 잔혹’이란 형용모순은 ‘사랑의 계시’를 허망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구약성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일화는 곤혹스럽다.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바치기를 원하는 신의 개념은, 그 내러티브 속에서 인신공희 또는 장자를 제물로 바친 고대 사회 제의의 흔적을 파악하면서 합당한 제의형식으로 전화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무척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초등생을 위한 신앙교재에서 아브라함의 맹목적 신앙을 칭찬한 것을 보았는데 그러한 신과 신앙은 기독교를 고대인의 무지몽매한 종교로 환원시키고 만다.
신약성서에서 신은, 아브라함을 말린 그 신이 이제는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친다.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을 준행하였을 따름이지만 신은 스스로 결단하여 자신의 아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죽음에 내어놓는다.
이러한 잔혹 계시는 지드 같은 말하자면 ‘신성한’ 인본주의자에게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에 걸맞은 계시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보지 않았을까. 여기서 하나님이 (‘전능의 신’이란 관점에서 죽음을 방관하거나 사태를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자신의 아들을 죽였지만, 아들이 곧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아 스스로 계시가 되었다고 주장하여도 지드는 납득하지 않았을 터이다. 형식논리상 창조주의 죽음은 창조세계의 종말을 뜻한다. 근대에서 신의 문제는 신의 살해라기보다는 신의 추방을 통해 창조세계의 저작권을 약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주의 죽음은 창조세계에서 반드시 막아야 할진대, 창조주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발상은 무책임해 보인다.
부활에 이르면 논의가 더 복잡해질 수 있는데, 일견 비판론자들이 그 사랑을 치명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폄하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사기라고까지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에게 너무 당연한,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계시로서 예수가 기독교 바깥에서는 그리스도의 궐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은 황당하기만 한 것일까. 물론 신적인 계시가 인간적 이해를 전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해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이든 수용을 상정하지 않은 계시(啓示)는 계시라고 할 수 없다.
예수를 계시로 내어놓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드의 비난. 이 비난에 맞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계시를 옹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에서 계시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거대한 미스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