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현대의 기독교 사상이 소위 발전과정에 접안한 흥미로운 지점을 ‘초월론적 경박성’으로 표현할 수 있지 싶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식과 자의식에 대한 다소 예리한 반성을 통해서 ‘최종적 확신’의 형태로 분류될 수 없었던 모든 종교적 내용은 문제성이 있는 것, 혹은 심지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설명되었다. 칼 바르트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 신앙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을 가리켜서 “간접적 데카르트주의”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의존적이라고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믿는다.”
코기토의 철학에서 ‘나’의 존재증명은 동어반복일 따름이다.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나로 사전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바르트가 말한 ‘간접적 데카르트주의’는 신앙이 코기토주의로 환원된 사태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는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놀랍지도 않다. 데카르트가 말한 존재하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나이기에, 결국 그 설명은 신의 자기 설명과 동일하다.
신의 대체, 혹은 신의 소외는 생각하는 나를 가능케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고, 그러한 전제조건에 대한 인식은 모종의 신적 인식이자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파노라마가 지각되는 한, 내가 보지 못하는 나라는 파노라마의 중심점은 나로 설정되어야만 한다. 세계와 대결하는 데에만 몰두한 근대인에겐 나의 과잉과 나의 결여가 동시에 출현하며, 신적인 것의 과잉과 신 자체의 결여와 연결될 수 있다.
신의 복원, 혹은 신앙의 회복과 관련하여 미하엘 벨커는 ‘주관적 전회(subjective turn)’를 ‘성령론적 전회’로 대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론적 전회’는 ‘주관적 전회’를 대체하기에, 혹은 무리해서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기에 전근대적 인간관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성령론적 전회’를 기획하는 사람은 그렇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우리는 무한루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변증법을 믿어야 한다. 지양은 떠올려짐이고,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이기에, 쏟아부음의 깔대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전회(turn)는 수평적 차원에서 돌고도는 도돌이표 전회였기에 초월론적 경박성을 탈피할 수 없었다. 상투적이지만, 불가피하게도, 수직적 전회(turn) 없이는 데카르트나 경박성과 작별할 수 없다.
우연찮게도 예수가 고통받으며 죽어간 그 자리는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수평적 포용과 수직적 은총의 교차로이다. 이 교차로를 사유의 아이콘이나 믿음의 안주처로, 고민 없이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번에는 은총의 경박성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경박하지 않은 삶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경박하지 않은 믿음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