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2018)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 스틸 컷ⓒ Focus Features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The Little Stranger)>(2018)는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동명 소설(2009년)을 영화화 했다. 여기서는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이 만든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에만 국한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한다. 원작은 꽤 두꺼운 분량의 장편 소설이고 소재를 가공하는 접근 방법이나 텍스트의 결이 영화와는 다를 것이기에 에이브러햄슨 감독이 연출한 영상 언어에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1942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 제목을 한글로 바꾸면 '작은 이방인'이 된다. 제목에 '이방인'(Stranger)을 넣었다면 어떤 감독이나 어떤 작가도 자신의 창작과 관련하여 카뮈의 <이방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예컨대 카멜 다우드가 지은 <뫼르소, 살인 사건>은 제목 자체에서 카뮈에 정면으로 맞설 뿐 아니라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있네"라는 첫 문장은 <이방인>을 비틀어 카뮈를 오마주 한다. 널리 알려진 카뮈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이다.
이방인과 프로이트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 스틸 컷ⓒ Focus Features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는 주인공 의사 패러데이(도널 글리슨 분)가 면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거울 속에 비친 패러데이의 얼굴을 잡는다. 하얗게 비누거품에 덮인 얼굴을 면도칼이 4분의 1이나 드러냈을까, 벨이 울려 면도를 중단하고 전화를 받으러 가는 것이 영화의 도입부이다.
영화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의 영국의 어느 지방 마을. 패러데이의 고향이다. 하층민 출신인 패러데이는 금의환향하여 촉망받는 의사로서 고향마을의 삶을 꾸려간다. 도입부의 전화는 그 지역의 유력 가문 에이어스 가(家)에서 걸려온 것으로, 패러데이는 차를 몰고 에이어스 가의 대저택 헌드레즈홀에 왕진을 간다. 에이어스 가는 몰락한 젠트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큰 부상을 입은 아들 로데릭, 딸 캐롤린, 그들의 어머니 에이어스 부인, 그리고 하녀 한 명과 지프라는 개 한 마리가 쇠락의 길에 접어든 헌드레즈홀에서 살아간다.
패러데이에게 헌드레즈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축제가 열렸을 때 경외심을 갖고 부모와 함께 찾은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패러데이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일한 하녀였다. 패러데이의 첫 방문에서 격식을 갖춰 그와 인사를 나누던 에이어스 부인은 패러데이가 하층민 출신임을 파악하자마자 냉담한 태도로 돌아선다.
출신성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패러데이와 에이어스 가의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차 역전되어 이후 패러데이가 몰락해가는 이 가문을 돌보는 후견인 역할을 맡는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유령의 집 같은 고택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에이어스 가문 사람들이 하나씩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에 패러데이만 남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멜로물인지 스릴러인지 애매하게 전개되던 이 영화는 패러데이와 결혼할 것 같았던 캐롤린이 결혼을 마다하고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에 의문사하는 장면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사실 이 영화의 장르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처음과 끝에 나타나는 패러데이의 얼굴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면도를 마치지 못해 하얀 비누거품으로 덮인 얼굴은, 영화의 마무리와 함께 드러나 '더 리틀 스트레인저'가 누구인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동경과 욕망의 대상에 고착된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의 영역에서 구체적 행위로 실현되는지를 영화는 포착한다. 인간 내면의 열등감과 그것에 조응한 강력한 욕망은, 그 열등감과 욕망이 강할수록 더 강력하게 삶을 지배한다. 어떤 유형의 인간은 열등감과 욕망의 강한 지배를 견뎌내기 위해 그 상황의 대부분을 무의식으로 이전해버린다. 강한 욕망을 견뎌낼 만큼 강한 자아가 아니라면, 욕망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욕망을 무의식에 숨긴다. 속류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여, 어린 패러데이는 헌드레즈홀 앞에서 거세공포와 강렬한 남근선망에 동시에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으며, 어린 패러데이는 팽생 패러데이를 따라다닌다.
'피에 누아르(pied-noir)'와 패러데이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 스틸 컷ⓒ Focus Features
1960년 1월 4일, 자동차를 몰고 파리로 향하던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 남부에서 도로변의 나무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문학평론가들은 대체로 그의 대표작 <이방인>의 뫼르소가 카뮈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소설인 <이방인>의 배경은 알제리의 수도 알제이다. 알제는 카뮈가 성장하고 활동한 중심 무대이며 알제리 제 2의 도시 오랑은 <페스트>의 무대이다. 카뮈는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인이기도 하다. '피에 누아르(pied-noir)'는 독립하기 전 프랑스령 알제리에 거주한 유럽인을 부르는 말. 카뮈가 대표적인 '피에 누아르'였다.
근대에 오랫동안 프랑스 영토에 속한 알제리에서는 '검은 발'이란 뜻을 갖는 적지 않은 수의 '피에 누아르'가 존재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을 거치며 두드러지게 되는데,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인이면서 알제리인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인도 아니고 알제리인도 아니었다.
알제리에서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카뮈에게 당연히 고향은 알제리(정확하게는 튀니지 국경에서 멀지 않은 드레앙. 프랑스 지배 당시의 지명은 몽도비)였지만, 알제리에게 카뮈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을 읽으면서 한국 독자는 프랑스인 세상이 들어온 아랍인을 유별난 프랑스인 뫼르소가 살해한 것으로 이해하겠지만, 알제리 독자는 아랍인 세상에 들어온 이방 프랑스인들이 아랍인을 살해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 스틸 컷ⓒ Focus Features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의 패러데이는 헌드레즈홀의 '피에 누아르'라고 할 수 있다. '피에 누아르'는 고향 알제리에서 쫓겨나지만, 영화 속에서 패러데이가 종국에 헌드레즈홀을 차지한다는 다른 결말로 인해 패러데이에게 '피에 누아르'와 반대되는 운명이 주어졌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패러데이는 헌드레즈홀에서 이방인으로 설정되고, 끝까지 이방인으로 대접받다가, 폐허뿐인 헌드레즈홀을 차지한다.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인정이다. 이방인이란 상시적인 인정투쟁에 휩싸인 자라 할 때 영화 끝부분 '더 리틀 스트레인저'의 눈물은, 그의 인정투쟁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그 투쟁은 다시 시작되어야 하리라. 인정받으려는 욕망 없이 주어지는 인정은 이방인에게 갈구의 대상이지만, 영화 <더 리틀 스트레인저> 식으로 말하면 인정받으려는 욕망 없이 그렇게 주어진 욕망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허망하다.
이 영화를 멜로나 스릴러로 받아들이면 약체로 느껴질 수 있다. 멜로적이고 스릴러적인 요소를 버무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불가피한 상처와, 상처를 치유하며 보석을 만들어내는 진주조개와 달리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불가해한 욕망으로 치닫기 마련인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랴, 불가해한 그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증거하는 유일한 표식임을.
덧붙이는 글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