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떠난 후로 가끔 카페에서 일한다. 카페 문을 열면서 눈대중으로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다. 구석지고 창밖을 볼 수 있는 곳이 상석이다. 자리에 쌕을 올려놓아 영역을 확보한 후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돌아와 노트북을 켠다. 창밖을 마주하고 카페 안을 등졌다. 그다음에 해야 하는 일은 와이파이를 찾아 그곳에 노트북을 연결하는 것이다.
간단한 몇 가지 숫자를 입력함으로써 나는 연결된다. 물론 핸드폰을 통해서 이미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중복해서 연결을 확인한다. 화면이 커지면 연결이 커진다. 글자가 커지면 확신이 배가된다. 더 큰 연결과 더 큰 확신이야말로 중년의 특성이다. 그러한 연결과 확신 속에서도 세상은 압도적이다. 세상은 압도적이며 동시에 반복된다. 어제의 연결과 오늘의 연결이 다르지 않다. 반복을 통해 나는 확신된다.
확신은 당체 공허하고 연결은 항상 비릿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열망과는 달리 연결이 소속감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번잡한 카페에서 연결을 통해 나는 카페라는 공간을 탈출한다. 나는 저들과 다른 시공으로 일탈한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뾰족한 쾌감을 산출하지 않는다. 일상적 일탈과 불가피하고 자발적인 고립 속에서 식은 스타벅스 커피를 홀짝인다.
아무튼 나는 아무도 모르게 연결되었고, 연결되어 일을 한다. 노트북을 보느라 굽어진 목을 펴서 가끔 창밖을 바라본다. 누군가 지나간다. 어쩌다 눈이 마주친다. 서로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당연히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나갔다. 차가 지나간다. 익숙한 번호를 붙인 버스가 지나간다. 개도 지나간다. 그 버스는 언젠가 내가 탔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내가 탈 버스가 아니다. 나의 개는 집에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50살이 넘은 남자가 노트북 모니터 너머를 힐끔거리며, 오지 않을 애인을 기다린다고 상상한다. 애인에겐 유통기한이 있다. 모든 애인은 반드시 오지 않을 애인이어야 한다. 그나마 오지 않을 애인이어서 다행이다. 50살이 넘어서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켜놓은 남자에게 애인이란 상품은 유통되지 않는다.
카페는 기다림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기다림은 자유이지만, 광고와 달리 기다림을 기다리는 건 덜 자유이다. 와이파이의 강도가 세면 나의 노트북이 기뻐한다. 약해지면, 하는 수 없다. 노트북 모니터가 없으면, 모니터 너머가 없어진다. 너머를 응시하는 행위는 어느새 습관이 된다. 팔을 절단한 사람이 없는 팔에서 가려움을 느끼듯, 중독은 부재를 너머로 은닉하는 천형이다. 카페인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슬플 것이다. 기다림이 없는 세상도 슬플 것이다. 너 없는 세상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너 없이도 슬프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