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1971년작 대 2017년작, 시겔 대 코폴라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17년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은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비롯하여 많은 얘깃거리를 남긴 작품이다. 소피아가 <대부>, <지옥의 묵시록> 등 영화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작품을 연출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이라는 점과, 그의 어머니 엘레노어 코폴라 또한 2016년에 <파리로 가는 길>로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여 코폴라 일가가 ‘감독’ 가문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더불어 회자된다. 무엇보다 2017년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이 1971년 돈 시겔 감독의 동명 영화 리메이크작이라는 사실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마지막 얘깃거리와 관련해서 영화애호가들은 간단하게 두 작품 중 어느 작품이 더 나은가를 따지지만, 두 감독 모두 내로라하는 수준의 작가인 만큼 두 영화에서 우열을 가리려 들기보다는 취향의 차이를 확인하는 게 현명한 감상법이지 싶다.
시선에서 드러난 젠더 감성의 문제
두 작품의 차이는 확연하다. 감독의 성(性)이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1971년작’에서 남성성이 물씬 풍긴다면, ‘2017년작’에서는 여성성이 전편(全篇)에 우러난다. 흔히 도식적으로 대상화와 주체, 이런 틀이 선호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용어를 준용하여 극의 전개를 살펴보자.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1971년작’과 ‘2017년작’에서 모두 동성애 코드가 살짝 엿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동성애는 주변화하여 주목거리가 되지 못하고 ‘일 대 다(多)’의 이성애가 전일하게 영화를 끌어간다. ‘일 대 다’에서 ‘일’에 초점이 맞춰진 건 예상대로 ‘1971년작’이고, ‘2017년작’에서는 ‘다’에 초점이 맞춰진다. 굳이 확인하고 넘어가자면 ‘일’은 남성이고, ‘다’는 여성이다.
시작 장면의 대비가 극명하다. 스토리가 전개되기 전의 ‘영화적’ 도입부는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남부 소녀와 북군 병사의 만남부터 살펴보자. ‘1971년작’에서 북군 병사 존 맥버니 상병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부상당했지만 꼿꼿이 선 채로 버섯 따는 소녀에게 발견된다. 반면 ‘2017년작’에서는 존 역의 콜린 파렐이 부상당해 누워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1971년작’에서 이스트우드는 처음에 소녀를 내려다보았지만, ‘2017년작’에서 파렐은 애초에 소녀를 올려다보게 된다. ‘1971년작’이나 ‘2017년작’ 모두 극중에서 명백히 병사가 소녀에게 발견되었지만, ‘1971년작’의 이스트우드는 분위기상으로 마치 자신이 소녀를 발견한 듯 행동한다. 소녀 입장에서는 병사를 쳐다보다가 내려다보는 것으로, 두 작품 사이에 분명한 시선의 변화가 목격된다.
이스트우드는 들것에 실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에 포획되어가는 가운데 일종의 양키식 유머라고 할까, ‘예쁜 남군’에게 항복의사를 표시한다. 시쳇말로 정신승리, 또는 흔히 말하는 양키식 유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장면은 동시에 부상당한 북군 남자 이스트우드가 항복이라는, 유머가 가미되었고 약식이긴 하지만 병사로서 합당한 전쟁의식을 수행하기를 잊지 않았다는 남성성 또는 주체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는 영판 남자이고 남루한 순간에도 당당한 ‘주체’이(고 싶)다. ‘1971년작’에서는 이스트우드가 ‘항복한다(surrender)’고 이처럼 주체적으로 선언하는 반면 ‘2017년작’에서 파렐은 ‘포로(prisoner)’로 받아달라고 여인들에게 간청하게 된다. 항복은 내(남성)가 하지만 포로로 받아들임은 상대(여성)가 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2017년작’은 처음부터 ‘1971년작’을 전복한다. 즉 남성에게 동사가 명사로 전복되는 현상이 출현함과 동시에 여성에게 동사가 위임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같은 전복을 목격할 수 있다. ‘1971년작’을 보고 ‘2017년작’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 전복은 전적으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에게 속한다. ‘1971년작’에서 마지막 장면의 주역 또한 예상대로 ‘남성’인 이스트우드이다. 독버섯 요리로 독살당한 이스트우드의 시신은 천으로 포장되어 집 밖으로 버려진다. 시겔 감독은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주검인 채 집 밖으로 버려지는 주인공의 마지막을 고정점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2017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역이 여성들로 바뀐 건 너무 당연하겠다. 코폴라 감독은 여성들의 버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카메라로 하여금 그들을 따라다니며 찍게 하고 집 밖에서 집 안의 여성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낸다. 시겔이 이스트우드가 버려지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코폴라는 니콜 키드먼 등 여성들이 합심하여 사체를 버리는 데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마지막 장면을, 위에서 아래로 앵글에 변화를 주지 않으며 고정한 상태로 시겔이 찍었다면 코폴라는 앵글을 바꿔가며 수평으로 찍는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시겔의 시선이 남자 주인공의 ‘부당한’ 몰락을 암시한다면 코폴라는 명백하게 여성 주인공들의 능동적 대응을 보여주는 시선을 제시한다.
시선처리의 대비는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목격된다. 병사가 독버섯요리를 먹고 쓰러지는 장면에서 이스트우드가 벌떡 일어나 분노의 시선으로 여성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식탁에 앉아 있는 여성들은 차마 그의 눈길을 마주 대하지 못한다. 독살에 공모한 그들은 눈을 내리깐 채 그의 시선을 회피한다. 이스트우드는 식당 밖으로 나가 혼자인 채로 화면 밖에서 쓰러져 죽는다. 반면 파렐이 죽을 때는 함께 식사하던 여성들이 담대한 눈길로 병사의 시선과 ‘맞짱’을 뜬다. 부딪히는 두 시선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 파렐은 여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식당 안에서 벌렁 나자빠져 죽어간다. 죽어가는 파렐을 카메라는 위에서 잡는다. 여성의 시선이다.
본유의 성욕과 설명되어야 하는 성욕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의 주요 모티브는 성욕이다. 혹은 이성애의 리비도, 즉 흔히 말하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 섹스는 아니다. 섹스는 불완전한 형태로 단 한 차례 애매하게 등장한다. 한 남자와 여러 여자의 성적 긴장이, 또 다른 긴장 혹은 적대로 전면 대치되기 전까지 영화를 지배한다. 시작부터 중반 이후까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성적 긴장이 끌림의 서정이라면 결말 부분에 드러난 적대는 내침의 서사라 할 만하다. 이것이 사랑의 기본형식이긴 하다. 부언하면 ‘서사적 서정’으로 시작해 ‘서정적 서사’로 끝나는 가운데, 앞의 피수식어 서정과 뒤의 수식어 서정은 동일한 듯 판이하다. 또는 판이한 듯 동일하다.
‘끌림의 서정’을 유발하는 일반적 형식인 ‘긴장’의 동인은 성욕인데, 짐작할 수 있듯이 두 작품에서 다르게 설정된다. ‘1971년작’에서 여성들의 성욕은 철저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표명된다. 한 남자를 두고 경쟁관계에 돌입한, 나이 많은 순서로 세 여자의 성적 욕망은 매우 친절하게 설명된다.(이 영화적 친절함은 곧 살펴보겠지만 작품 자체의 완결성을 떨어뜨릴 위험을 내포한다.)
근친상간의 친오빠를 잃어버려 상심과 결핍에 빠져있던 차에 등장한 낯선 남자는 그 대체물로 그려진다. 아버지에서 비롯된 억압으로 마음을, 나아가 몸을 열지 못하는 미욱한 처녀는 영화 속에서 성적으로 계몽된다. 10대 후반의 소녀는 성적 호기심에 충만한 발정 그 자체이다. 극중 여성들이 이렇게 각기 다른 양태의 성욕으로 설명되는 반면, 그들의 상대인 남성의 성욕은 굳이 설명되지 않고 본유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2017년작’에서 여성의 성욕은 남성의 성욕과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그저 주어진 것으로 그려진다. 이 모호성을 극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받아들인다면, 영화 자체는 물론 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싶다. 정확하게는 부분적이고 왜곡된 이해다. 성욕은 인과적 현상이 아니다. 그냥 주어져서, 원할 때는 물론 원하지 않을 때에도 출몰하는 ‘메타 인격적 특성’을 보인다. 그런 특성은 남과 여에게 동일하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어떤 성적 대상에게 끌릴 때 ‘끌린다는 것’이 유일한 사실이자 해명일 텐데, 남자와 달리 그 이유가 꼭 설명되어야 한다는 ‘1971년작’의 접근은 여성에 대한 지나친 몰이해에 기반한다.
게다가 한 남자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세 여자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연분이 맺어져서 고립되고 불편한 그 공간을 함께 떠나기로 언약한, 즉 이스트우드의 낙점을 받은 여자는 이스트우드로부터 “virgin bitch”라는 욕을 들어먹은 바로 그 ‘억압 처녀’이다. 근친상간녀나 발정 난(혹은 까진) 어린 암컷이 아니라 결국 처녀가 간택을 받는 ‘해피엔딩’은 성욕에 충만한 마초지만 ‘책임’질 줄 아는 가부장적 남성성의 전형과 맞닿아 있다.
처녀가 승리한다. 정신적 억압을 뚫고 처녀성을 헌납하는 모범적 여인은 상을 받고, 방종한 여인들은 버림받는다. 그러한 판단을 내리고 집행하는 이는 세 명의 여인 모두에게 욕정을 품은, 심지어 극 초반부에 어린 소녀에게 (성적인 뉘앙스가 분명하게 드러난) 키스까지 한 남성 이스트우드다. 같은 해에 발표된 돈 시겔의 영화 <더티 해리>에서 주인공 해리가 사법체계(justice system)를 무시하며 정의(justice)를 구현하는 모습과 비슷한 구도이다.
‘2017년작’에서는 여성들의 성욕에 관한 설명이 생략된다. 근친상간도, 결혼 언약도 없앴다. ‘2017년작’의 여성들은 여느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유 없이) 모호하고 간절한, 때로 불편한 성욕에 휩싸이는가 하면 (확신 없이) 섹스에 뛰어들기도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욕과 섹스의 이유가 그 욕망의 주체에게 대체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해명되지 않은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에 대해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망 속에서 (책임질 수 있든 없든) 스스로 헤쳐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편의적으로 정리하면, ‘1971년작’에서 대상화의 피동성에 머물렀던 여성들이 ‘2017년작’에서 주체화의 능동성을 구현한다. 또는 진실에 가깝게 정리한다면, ‘2017년작’에서 모든 등장인물은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즉 ‘1971년작’의 ‘남성’은 ‘2017년작’에서 소멸하고 대신 인간이 등장한다.
역사주의 vs. 구조주의
‘2017년작’에서 ‘인간’을 드러내는 연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공간’을 채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길은 (비록 중간지대가 있다고는 하지만) 남성 혹은 여성이란 성정체성과 함께이다. 즉 인간의 길에는 여성의 길과 남성의 길 외에 제3의 길은 현재 ‘사실상’ 봉쇄돼 있다(지금 주제가 남성과 여성인 만큼 일단 성소수자 혹은 제3의 길은 논외로 한 논의이다.).
인간이 여성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인간임을 주장하게 된다고 할 때 ‘2017년작’에서 ‘여성의 공간’이 관류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코폴라는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랜 소수자인 여성의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탈(脫)역사주의의 말하자면 구조주의 공간을 구축한다. 간단히 말해 ‘2017년작’에 제시된 ‘여성의 공간’에 던져진 병사가 미국 남북전쟁기의 북군 소속 존 맥버니 상병이 아닌 한국전쟁 시기의 남한 병사 김철수 소위라 해도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적 긴장이 조성되고 해법이 모색되는(또는 파국에 이르는), ‘1971년작’의 안티테제로서 순수한 남녀문제 혹은 여성배제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코폴라는 ‘2017년작’에서 ‘1971년작’의 역사성을 전면 삭제했다. ‘1971년작’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흑인 여성노예가 ‘2017년작’에서 사라진 것을 두고 코폴라 감독에게 역사의식이 부재하다고 지적한다면 이러한 배경에서 부적절하다는 강경한 반론에 직면할 것이다. 역사의식의 부재라기보다는 구조주의적 전망을 획득하기 위한 과감한 생략이 코폴라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1971년작’에서 구현한 정도의 어정쩡한 역사주의로는 역사성을 전면적으로 떠안을 수 없다. 역사성을 포기함으로써 코폴라는 탈(脫)역사적 주제인 여성문제를 예술적으로, 또한 은유로서 형상화한다. 그가 만든 ‘여성의 공간’은 전술한 대로 역사적 맥락을 없애 어떠한 남성, 어떠한 여성을 투입해도 작동한다. 방백 형식의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이는 ‘1971년작’과 달리 이웃집 풍경을 바라보듯 스크린 밖에서 관찰자의 위치에만 머물러야 하는 ‘2017년작’의 구조주의적 냉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욕의 원인이 설명되지 않듯 인물 행동의 원인 또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려지고 관객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971년작’ 감독의 설명은, ‘2017년작’의 입장을 채택한다면 과잉친절이 된다.
‘2017년작’은 영화를 시작하면서 ‘1971년작’의 남북전쟁 장면을 없애고 몽환적인 숲길을 보여준다.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 또한 병사에서 소녀로 바뀐다. 남북전쟁 사진을 보여주고 이스트우드로 하여금 전쟁노래를 부르게 한다고 반전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또한 흑인 여성노예를 등장시켜 억압된 삶을 보여준다고 해서 흑인노예 문제가 영화의 전면에 자리 잡는 것도 아니다. 코폴라 감독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1971년작’은 같은 해에 개봉된 <더티 해리>의 사촌이다. 총잡이 마초 이스트우드가 불명료한 역사주의의 세례를 받아 거세당한 마초로 변신하여 불쌍하게 죽어간 게 시겔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이다. <더티 해리>와 마찬가지로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남성성이 영화의 중심에 떡 하고 자리한다. 거세당한 마초 또한 마초이며, 어떤 의미에선 거세당한 마초야말로 더 마초이다. 반면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시겔의 영화에서 소거된 여성을 복원하는 한편 또 다른 보편적 관점에서 억압된 남성을 해방하여 인간으로서 여성과 만나게 한다.
그 만남의 장소가 현재로선 ‘여성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을 여성주의 영화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굳이 ‘주의’를 붙인다면 ‘인간주의’를 붙이라고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