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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Aug 30. 2020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가장 비참한 ‘세계의 운명’

영화평 '하워즈 엔드'

'하워즈 엔드' 영화리뷰(영화평)

영화 <하워즈 엔드>는 영국 '에드워디언 시대’(1901~1910)를 배경으로 다른 개성의 중산층 자매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조명한 작품이다. 당대의 시대상을 조명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을 통해 지금 사회 또한 통찰할 수 있음은 모든 장르ㆍ종류 좋은 작품의 특징이다. <하워즈 엔드>는 그런 작품에 속한다. “당신은 나에게 마지막 영국인처럼 여겨진다.”라고 D.H. 로렌스가 평한 영국 소설가 E.M.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스토리는 탄탄하다. 좋은 원작, 유려한 각본, 탁월한 연출이 어우러진,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가 <하워즈 엔드>이다.     


시작과 끝     


포스터는 1879년에 태어나 1970년에 작고했다. 생애가 20세기에 길게 걸쳐 있지만 작가 이력은 대부분 '에드워디언 시대’에 몰려 있다. 이 시대는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재위기인 1901~1910년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890년부터 제1차세계대전 발발 시점(1914년)까지로 넓게 보며, 세기말과 세기초를 포괄하는 시기이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이 수립된, 1871년부터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의 시기, 즉 프랑스에서 ‘벨에포크’라고 부르는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 시작하면서, 세계대전이란 끔찍한 공통의 경험을 겪기 직전 정점에 달한 근대정신이 이 시대의 배경이며, 동시에 영화의 배경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봉건성의 잔재가 사라져가고 이성에 근거한 새 시대의 희망찬 미래에 기대를 걸던, 겹쳐짐의 시기이다.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는 데 따른 새로운 문제와 옛 시대에서 넘어온 오래된 문제가 함께 존재한 골치 아픈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마차와 자동차가 도로를 함께 달리던 장면을 떠올리면 되겠다. 

영화를 끌어가는 두 인물은 ‘마거릿’(엠마 톰슨)과 ‘헬렌 슐레겔’(헬레나 본햄 카터)이란 영국 중산층 계급의 자매이다. 자매는 지식과 교양을 존중하며 여성참정권 등에 관심을 두고 토론을 즐기는 진취적 여성이다. 영화에서 보듯, 자기 이름의 명함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체이다.


중산층과 중간계급이란 말이 혼용돼 쓰여서 애매하긴 하지만 자매의 가족을 기능상 중간계급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해 보이며 신분상으론 이들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봐도 되겠다. 다수의 피지배계급에 군림하는 소수의 지배계급 중에서 비교적 낮은 계층 정도?


자매는 부유하고 보수적인 ‘헨리 윌콕스’(안소니 홉킨스) 가문과 가난한 ‘레너드 바스트’(사무엘 웨스트) 부부 사이에 끼어 갈등과 대립, 그리고 만일 그러한 게 있다면 화해 등 사건을 만들어낸다. '에드워디언 시대’가 영화의 시간이라면 도시도 농촌도 아닌 근교의 ‘하워즈 엔드’는 영화의 공간이다. 영화는 공간적으로 ‘하워즈 엔드’에서 시작해 ‘하워즈 엔드’로 끝난다. 수미상관 구조에서 영화의 처음과 끝의 핵심인물이 헬렌인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며 더불어 이름에서 자연스럽게 트로이 전쟁과 그리스 문명을 떠올리게 한다. 


근대 이래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헨리 윌콕스와 부르주아의 맞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바스트가 대결하는 가운데 언니 마거릿은 부르주아 진영, 동생 헬렌은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연결된다. 바스트가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지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포스터의 동명 소설의 헌사는 “단지 연결하라.”(Only connect.)인데 중간계급의 헨렌이, 노동자였다가 실업자가 되어 끼니마저 걱정하는 바스트와 연결될 수 있었던 지점이 교양과 지식이었던 것은 마거릿ㆍ헬렌 자매의 ‘진보’의 한계와 속물성을 보여준다. 물론 윌콕스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속물성이 나타나지만 그들에겐 부르주아 계급답게 물신성이 훨씬 더 부각된다. 윌콕스 가문에선 일관되게 물신성에 입각한 솔직함과 당당함이 드러난다. 속물은 본질상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자본은 본질상 스스로 자명하고 자랑스러운 존재이다.


정작 이중성에 직면하고 시달리는 건 슐레겔 자매이다. 슐레겔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돈을 버는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다. 아마도 물려받은 재산 등에 기대 교양과 지식을 쌓으면서 여성참정권 등 세계의 제한된 진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노동자이자 빈민이지만 지적이고 교양이 있는 바스트와 같은 ‘예외적’ 하층계급을 측은하게 여겨 동정을 베푼다. 바스트는, 애초에 그 시대 지적인 노동자에게 예고된 운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슐레겔 자매와 연결을 통해서 오히려 더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바스트를 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는 ‘하워즈 엔드’에서 최종적으로 연결되며 화해한다. 바스트와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하워즈 엔드’의 미래의 주인으로 점지되어 ‘하워즈 엔드’의 영속성을 은유한다.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바스트와 같은 계급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장면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바스트의 입장에 서서 영화를 보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며 시종일관한 자연주의적인 냉철에 섬뜩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이처럼 더 몰락할 것도 없는 하층계급의 몰락을 아름다운 영상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숨은 그림처럼 전한다. 연결되지 않고 홀로 고립되어 황망하게 죽어간, 그것도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인문교양에 매료되었다가 책장에 깔려 죽은 바스트가 영화적 형상화에서 소외된 것이 아쉽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지 싶다. 개인적으로는, 비참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더 열성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비참함이 희미해진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숨은 그림을 찾아내기 위해 더 열심히 그림판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은근한 사회비판이 때로 더 큰 호소력을 갖는다고 본다.     


많은 이야기     


<하워즈 엔드>가 계급 간의 갈등과 근대 및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사회의 병리와 모순을 드러낸 것이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구성에서 ‘하워즈 엔드’라는 저택에 이야기를 집중하는 바람에 앞서 언급하였듯 확고한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표명되지는 않는다. 캐릭터 표현이 잘 됐고, 이야기 전개의 완급 또한 적당하며, 시대상과 인물 간의 풍경이 풍성하게 포착되었기에 영화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겼다.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여러 이항대립을 통해 다층적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서 헨리 윌콕스 헨리의 첫 번째 부인 루스(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하워즈 엔드’의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공간적으로 런던과 대비되는 ‘하워즈 엔드’는 다양한 상징으로 동원될 수 있으며, 그러하기에 영화와 소설의 제목이 되었을 터이다. 


포스터의 소설 중에선 <하워즈 엔드>(1992년)를 포함, <전망 좋은 방>(1984년), <인도로 가는 길>(1984년), <모리스>(1987년), <몬테리아노 연인>(1991년) 등 모두 5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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