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테넷'
영화 ‘테넷’은 확실히 대작이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덩케르크’, ‘다크 나이트’ 3부작 등 화제작으로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역사를 쓰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으로, 놀란은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야심 찬 영화”라고 자부한 작품이 ‘테넷’이다. 그는 ‘테넷’을 만들기 위해 20년 동안 아이디어를 개발했고 6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앞으로 직접 각본을 쓰는 일은 삼가는 게 좋겠다.
두 개의 세계
‘테넷’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래’의 공격에 의한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미지의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워 세계를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전작(前作)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스토리가 전개되는 중요한 무대이다. ‘테넷’에서 시간은 더없이 중요한 요소다. ‘인셉션’과 ‘메멘토’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이며, 인간의 심리와 기억의 기반에서 현실을 새롭게 파악하고 구성하는가 하면 현실을 비틀어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되지 않은 판타지 세계를 창조한다. 반면 ‘테넷’의 시간은 세계의 시간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인버전’이란 설정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일그러진 세계로 재구성한다.
‘테넷’의 특이한 발상은 ‘뉴튼적인 세계’와 ‘아인슈타인적인 세계’를 병치시킨 데에 있다. 제작진은 영화 속의 보잉747 비행기와 격납고 폭발 장면을 CG가 아니라 실제로 촬영했다고 자랑하는데, 이 폭발은 우리 세계가 뉴튼의 고전물리학이 작동하는 세계라는 징표이기도 하다. 반면 영화에서 종종 묘사되듯 한 인간이 같은 공간에 동시(同時)에 따로 존재하는 상황은 뉴튼적인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뉴튼적인 세계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흐르기 때문에 불가역적이다. 어느 그리스 철학자가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말이 뉴튼의 생각을 대변한다.
반면 시간과 공간이 절대값으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비틀리거나 뒤집힐 수도 있다는 세계관은 뉴튼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편의상 이것을 ‘아인슈타인적 세계’라고 한다면 그 세계가 진실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사는 ‘뉴튼적인 세계’에 한정할 때 그것은 비(非)진리이다. 정정하면 우리가 믿는 뉴튼적인 세계는 상대적인 진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로 간주될 수 있다.
놀란 감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물리학은 대칭적이다. 시간은 순행하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하고, 동시간일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 어떤 사물의 엔트로피 흐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사물에 작용하는 시간도 되돌릴 수 있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논의는 물리학자들에게 맡기고, ‘테넷’에서 이 두 세계를 만나게 한 것이 놀란의 중요한 착상이었음을 지적한다. 심지어 영화의 클라이맥스 언저리에서는, 순방향의 시간과 역방향의 시간을 한 공간에서 같이 전개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거나 섞이는 영화는 많이 봤어도 ‘테넷’처럼 현재(이 개념이 지금의 문맥에서는 애매하지만)에서 정과 반의 시간의 흐름을 정면으로 충돌시킨 영화를 본 적은 나의 기억 안에는 없다.
‘인터스텔라’에서 함께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물리학자 킵 손이 ‘테넷’에 다시 참여해 대본을 검토하며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다.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한 작품이라는 게 제작진의 설명인데, 이러한 과학성의 추구는 살펴보겠지만 양날의 칼이 된다.
풍성한 볼거리
‘테넷’의 각본, 감독, 제작을 맡은 놀란 감독은 ‘테넷’에 대해 “기존에 없던 시간 개념에 SF와 첩보영화의 요소를 섞은 작품”이라며 “‘테넷’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셉션’의 아이디어에 스파이 영화의 요소를 첨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언급하였듯, ‘인셉션’이 개인의 의식과 심리에 정초한 반면 ‘테넷’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 아이디어라는 것은 뫼비우스 띠처럼, 회귀하지만 본래와 구별되지 않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구조를 뜻한다고 봐야겠다.
확실히 ‘테넷’은 뫼비우스 띠처럼 구성된 시간 위로 표류하는 설정을 빼면, 멋지게 악을 응징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닮았다. “관객들이 ‘테넷’을 통해 액션 시네마, 특히 스파이 장르를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어려서 스파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전율을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을 ‘테넷’을 통해 선사하고 싶다.”는 놀란 감독의 바람은 어느 정도 성취된 듯하다. 두 개의 세계관을 용융하여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에 섬세한 디테일이 더해졌으며 그 위로 고유명사를 부여받지 못한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이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제 역할을 연기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화에 등장한 인버전을 영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블루스크린이 아닌 실제 세트에서 배우와 스턴트 배우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고 달리고 싸워야 했고, 차량 역시 마찬가지로 정주행과 역주행을 반복했다. 또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IMAX 카메라와 대형 카메라를 사용했고 IMAX 포맷으로 관객이 화면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국,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에스토니아, 이탈리아, 인도 등 세계 7개국에서 촬영했고, 영화 역사상 최대 규모인 초대형 야외 세트장을 건설했으며, 전술하였듯 CG가 아닌 실제 보잉747 비행기와 격납고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무척 공을 들여 제작한 작품임은 분명하다.
캐릭터의 개연성과 대사의 깊이의 문제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름만으로 ‘테넷’의 출연을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영화에서 이름 없는 주도자의 역할을 수행한 그는 덴젤 워싱턴의 아들이자 미식 축구선수 출신으로 세상을 구한 영웅의 모습을 나름 묵직하고 충실하게 소화한 듯하다. 문제는 워싱턴의 맞수로 영화 속 악의 화신인 안드레이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이다. “잔인하고 병적으로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극도로 위험한 인물로 그의 야심과 욕심이 전 세계를 위기에 빠뜨리는” 인물로 설정됐다.
이 영화는 감독의 설명대로 ‘인셉션’의 아이디어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터미네이터’ ‘007’과 같은 기존의 강력한 영화 텍스트와 만화 드래곤볼까지 연상되는 놀란 판 종합 액션 스파이 영화이다. 스파이물에서 핵심은 당연히 주인공인 스파이이지만 그 상대인 악한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스릴러물의 악역과는 달리 스파이물의 악역은 크게 보아 캐릭터의 리얼리티나 캐릭터의 우의성(寓意性)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결을 볼 때 ‘테넷’에서는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악역이 어울릴 것 같은데, 세계멸망을 꾀하는 악의 화신은커녕 편집증에 사로잡힌 암환자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난 듯하다. 약간 다른 결이어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의적인 악의 캐릭터로 표현하는 대안이 있었음직도 한데, 그러기엔 현재 구현된 리얼리티가 강한 편이다. 결국 매우 허약한 악한을 매우 강한 수퍼 히어로의 맞수로 만들어놓아 영화는 심각한 불균형에 빠진다. 여기서 강함과 약함은 당연히 캐릭터 자체에 관한 것이다. 사토르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라기보다는 애초에 적정하게 작성되지 못한 대본의 문제이지 싶다.
주제를 정리해주는 장면이라고 할 클라이맥스의 주인공과 사토르의 대화는 더 엉망이었다. 사토르가 악의 화신인지 악의 대리인인지 불분명하고, 그가 세계멸망의 이유를 선포하는 대사에서도, 결국 캐릭터의 문제로 귀결될 테지만, 영화적 팩트는 불분명하고 어휘만 번지르르하다. 대가(大家)라는 명성에 취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세계적인 감독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계적인 기대치를 시종일관 맞출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발상, 박진감 넘치고 빠른 전개, 짜임새 있는 영상 등 전반적으로 훌륭한 영화로 평가받을 소지가 많았던 작품인 만큼 허황하고 과잉된 대사를 포함한 악(惡)의 캐릭터의 형상화 실패는 크나큰 옥에 티로 남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앞으로 연출만 하고 각본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