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리시맨'
“로버트 드니로와 나는 70대입니다. 삶을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고 영화의 재료를 바라보는 방향도 달라졌죠. 우리는 주인공과 그들의 주변 인물, 믿을 수 있고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의 인간성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다룰 수 있어요. 이 영화는 신의, 사랑, 믿음, 궁극적으로는 배신에 관한 것입니다.”
--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아이리시맨>은 영화로 작성한 미국 현대사의 연대기이다. 사서(史書)가 아니고, 더구나 통사가 아니다보니 영화라는 형식에서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특정 인물(들)의 일대기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써내려간다. 연대기로 봐야 하지만 영화 연대기인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술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다루는 기간은 1949~2000년. 시간의 중심축은 1975년이다. <아이리시맨>의 사건의 중심축은 그해 일어난 미국의 장기 미제사건 ‘지미 호파 실종사건’이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고, 로버트 드 니로ㆍ알 파치노ㆍ조 페시가 주연이다. 이름들만으로도 영화를 보기 전에도 대충 영화의 윤곽이 그려진다. 동시에 디테일이 풍성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로드무비?
로드무비이긴 하다. 요양병원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거동하기 힘든 82세의 노인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 그가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와 함께 길을 떠나는 1975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영화는 전개된다. 시런과 버팔리노가 처음 만난 곳도 길 위이다.
전형적인 로드무비 같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로드무비에서는 공간 개념이 강하게 부각되는 반면, 연대기를 표방한 이 영화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앞세운다. 게다가 시간이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1975년을 기준으로 1950ㆍ60ㆍ70년대로 돌아갔다가 1975년 이후 시간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고, 때로 과격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흔들어버린다.
영화의 시간 플롯은, 시간의 중심축을 1975년으로 하여 ‘지미 호파 실종사건’에 수렴되게 하면서 내레이션은 2000년을 현재로 전개된다. 영화가 개봉된 2019년 이후의 관객은 관객 자신의 시점에서 시런의 내레이션 시점을 통과해 1975년을 축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로드무비이자 연대기인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설계한 독특한 시공 안에서 영화적 전언을 표명하게 된다.
러닝타임이 209분에 이르는 이 긴 영화에서 스코세이지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고 내레이터 역할을 맡은 드니로가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배급사에서 내어놓은 한줄 스토리는 “20세기 미국 정치 이면에 존재했던 악명 높은 인물들과 연루된 한 남자의 시선으로 장기 미제 사건의 대명사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그려낸 영화”이다.
여기서 “한 남자의 시선으로 그려내었다”고 한 그 남자는 시런(드니로)으로 이 영화의 내레이터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찰스 브랜튼의 논픽션 <아이 허드 유 페인트 하우시즈(I Heard You Paint Houses)>로 주인공은 청부살인업자이다. “Paint House”는 살인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영화에서 시런은 사람에게, 특히 머리 같은 데다 총을 쏘아 벽에 혈흔이 튀는 모습을 “Paint House”로 표현한다. 이때 “House”가 “Houses”로, 복수로 표기되었음은 그가 청부살인을 상시적으로 수행하는 악한임을 뜻한다.
내레이터와 시선을 공유하는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한 남자”가 악당임을 알게 된다. 악당 시런이 연루되는 악명 높은 두 인물은 문제의 사건의 주인공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 이미 언급된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이다. 시런은 호파 및 버팔리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오랜 시절 ‘우정’을 유지하지만, 1975년 호파의 ‘실종’과 함께 ‘우정’이 막을 내린다.
호파 실종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인 만큼 아직까지 누가 범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Painter" 시런을 범인으로 설정하여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범인이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들은 시런이 범인임을 직감할 수 있다. 관건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내는가이다. 극중에서 호파에 대한 시런의 “Paint House” 장면은 아주 짧고 간결하다. 직업적인 정확성과 기계적인 민첩함을 냉담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우정’의 깊이와 배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지미 호파 실종 사건’ 또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호파는 1940~50년대 미국에서 “대통령 다음 가는” 명성을 구가한 국제트럭운전자조합(IBT, 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 1903년 출범) 위원장(General President)이다. 정식 이름이 제임스 호파인 그는 1957~67년에 위원장으로 재직하였고, 사기 및 뇌물수수로 수감되었다가 1971년에 가석방되었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IBT를 키우는 데 크게 기여한 호파는 IBT를 자신의 조합으로 생각하며 감옥에서 나온 뒤엔 다시 위원장 자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 사건은 영화에서 뼈대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뼈대에 훨씬 많은 살이 붙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아마도 인생 자체이지 싶다.
그들만큼 살아내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1942년생이다. 스코세이지 감독과 오랫동안 영화작업을 함께하였고, <아이리시맨> 또한 공동작업을 먼저 제안한 로버트 드니로는 1943년생으로 감독보다 한 살 어리다. 알 알 파치노는 1940년생, 조 페시가 1943년생이다.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인인 이들이 인생의 종착점에 근접하며 함께 만든 영화가 <아이리시맨>이다. 실제로 조 페시는 사실상 은퇴상태였기에 이 영화 출연을 위해 복귀한 셈이다.
80살을 코앞에 둔 스코세이지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로버트 드니로와 나는 70대입니다. 삶을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고 영화의 재료를 바라보는 방향도 달라졌죠. 우리는 주인공과 그들의 주변 인물, 믿을 수 있고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의 인간성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다룰 수 있어요. 이 영화는 신의, 사랑, 믿음, 궁극적으로는 배신에 관한 것입니다.”(보도자료)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황당하게 한국 정치사의 3김을 떠올렸다. 김대중(1924년생)ㆍ김영삼(1927년)을 먼저 보내고 지난해 숨진 김종필(1926년생)이 말년에 3김 시대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의, 사랑, 믿음, 궁극적으로는 배신. 한 마디로 인생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이 마지막에 배신을 배치한 이유는, 그만큼 살아보지 않아서 확언할 수 없지만 인간이 죽기 살기로 삶을 추궁하며 마침내 사랑하고 믿는 이들을 배신하기까지 하지만, 종국에는 삶으로부터 배신당하기를 결코 회피할 수 없다는 깨달음 같은 걸 반영하지 않았을까.
영화 후반부의 한 장면. FBI 수사관들이 시런을 찾아와서 신의를 지킬 사람들 모두가 죽었으니 이제는 사건의 전모를 밝혀달고 간청한다. 그러면서 누가 죽고 또 누가 죽었는지를 설명한다. 어떤 이의 죽음에 시런이 묻는다. “누가 죽였냐?” 수사관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암이 그랬다”고 대답한다. 관객들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 대목이야말로 스코르세지 감독이 말한 ‘궁극적인 배신’이 아닐까 한다. “Painter"는 서로가 서로에게 페인트 칠하며 어둠이든 밝음이든 삶의 한가운데서 죽어가야 “Painter"이다. 암에게 처단당한 말로(末路)는 “Painter"에게 삶의 배신인데, 궁극적으로 누구나 직면하게 된다. 이 영화의 내레이터 또한 “Painter"에게 당하지 않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화려했던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의 초입에 요양병원에서 자연사한다.
만일 인생이란 행로에 모퉁이 비스므리 한 것이 있다면, 이 영화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 출구를 마주한 사람이 갖게 되는 통찰 같은 섬광을 내비친다. 그러하기에 감독을 자신의 영화를 실내악에 비유했다.
이 영화는 맨 앞에 이야기하였듯 로드무비이며, 약간 불필요한 수식어를 붙여서 다시 표현하면 인생 로드무비이다. 동시에 20세기 할리우드의 대표적 영화인들이 남긴 비망록이기도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들을 한 작품에는 보는 날은 더 이상 없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