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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Sep 24. 2020

B급 감성을 A급 연출로 소화한 포스트모던한 발랄

영화평(영화리뷰)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 흥미로운 영화라는 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어 보인다. 이 영화를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갈래를 열어가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영화라는 대중예술 연출자로서 신 감독은 탁월한 감각을 지녀, 확실히 대중을 휘어잡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한다. B급 감성을 A급 연출로 소화해 내는 그만의 영화세계는 확실히 강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A+인지는 미지수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정상급 감독이 되기엔 2%가량 부족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니 그것으로 만족해도 큰 문제야 있을까 싶기도 하다.     


B급 감성의 A급 연출     


이 영화는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의 열린 결말이 시사하듯 지구를 구했는지가 불확실하다. 사실 지구를 구한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지구에 사는 인류를 구한다가 맞는 표현이다. 지구의 지배적인 종이 인류이든, 다른 외계 행성의 고등생명체이든 지구 입장에서는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이 영화가 그렇다면 인류를 구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인류를 구한다거나 지구를 구한다거나 하는 대의명분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소회(이정현)가 여고 동창생들과 함께 지구 혹은 인류를 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구하는 데에만 열중했을 뿐 인류를 구하는 데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바람 피운 남편, 자신을 배신한 남자,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외계인을, 살기 위해 죽였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독수리오형제가 아니었다.

코믹, 스릴러, SF, 호러에 액션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종합선물세트로 담은 영화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마지막 승부가 비장하게 그려지지 않고, 예상대로 해피엔딩이다. 이렇게 시시하고 엉성한 이야기로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면 앞서 칭찬한 대로 특출한 감각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 발휘된 것과 같은 특출한 감각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려면 극이 ADHD를 앓듯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할 때 얼마나 특출해야 할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신 감독의 영화 ‘시실리 2km’에서 나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산만하고 감각적이며 시도 때도 없이 허를 찌르는 연출은 두 영화에서 동일하게 관철되었다. 두 영화를 지배하는 세계관과 대치의 전선 또한 흡사하다. ‘시실리 2km’에서 ‘조폭 대 마을주민’, ‘도망간 조폭 대 쫓는 조폭’, ‘귀신 대 사람’ 등의 이항대립이 복잡하게 뒤섞이지만 한 가지 적대만은 끝까지 이어진다. 이 영화 또한 해피엔딩이다.


‘시실리 2km’와 마찬가지로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남자 대 여자’, ‘남편 대 아내’, ‘언브레이커블 대 인간’ ‘인간에 적대하는 언브레이커블 대 인간에 협력하는 언브레이커블’ 등 여러 이항대립이 뒤섞여 있다. 인류를 말살하려고 하는 외계인 언브레이커블은 악마로 표현되지 않았고 때로 사랑스럽다. 시종일관 대치를 이어간 언브레이커블 남편 만길(김성오)와 인간 아내 소희(이정현)를 두고 윤리나 선악을 얘기하기 힘들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그 밤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죽지 않았느냐만을 가린다. 외계인인 언브레이커블이 더 사악하지 않고 인간인 소희가 더 착하지 않다. 마지막 장면에선 소희가 인간인지 언브레이커블인지마저 불분명해진다.


선악의 이분법이 사라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가치구분이 소멸하는 가운데 등장인물은 서로 죽이려고 혈안이 되지만, 귀엽고 해학적으로 그려져 “죽이려고 혈안이 되다”와 같은 표현에서 상상되는 끔찍하고 악착같은 유혈은 없다. 이 영화의 세계관은 언뜻 포스트모더니즘에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의지는 기이하게 근대성의 면모이다. 근대성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측면에 해당한다. 그 어둠마저 영화의 날렵한 터치로 인해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이겠다. 종잡을 수 없지만 종잡을 수 없다는 그것만은 확고하기에 의외로 뚜렷한 관점을 형성한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2%를 어떻게 채울까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죽지 않는 언브레이커블(들)을 죽이는 이야기를 극화한 코믹 스릴러이다. ‘시실리 2km’, ‘차우’, ‘점쟁이들’에서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선보인 신정원 감독이 다시 한번 자신만의 영화색깔을 입증한 작품이다. 인류 멸망을 노리는 외계인 언브레이커블(들)과 엉성하기 그지없는 세 명의 대한민국 여고 동창 전사 사이 대결이란 식의 비대칭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웃음은 현실에서 종종 대면하는 익숙하지만 엉뚱한 맥락을 잘 짚어내거나 예상한 문맥을 적당한 강도로 파괴할 때 튀어나오는데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두 가지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유려하게 웃음을 끌어낸다. 막무가내 포스트모더니즘, 구조화한 비대칭, 웃음을 산출하는 고급스러운 감각 등이 전반적으로 잘 어우러져 이 영화를 볼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장점은 대개 단점의 요인이 된다. 장점이 단점으로 변화할 요인을 차단하며 장점만으로 얽어내는 능력을 갖춘 감독을 대가라고 부른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의 많은 장점을 설명할 많은 어휘 중에서 하나를 고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인데, 앞서 지적한 대로 그것이 뚜렷한 관점을 형성하였기에 마침내 영화적 완성도를 갉아먹는다. 대가들과 달리 신 감독이 단점화할 변화를 사전에 막아내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통상적으로 운위되는 메시지 같은 것을 거부하기에, 그 거부가 너무 확고하기에, 그것이 매시지가 되고 만다는 순환논법의 함정에 사로잡혔다. 해법은 두 방향으로 가능했다. 아예 완벽하게 메시지를 해체하든지, 아니면 확고하지 않게 보일 듯 말 듯 메시지를 섞어 넣든지. 후자의 방식은 마블링이 좋은 고기를 만드는 것과 비슷해서 인위적으로 정교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공학과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현재 신 감독에게 이것이 부족하다고 할 때 앞으로 두 방향 중 무엇을 선택할지 궁금하다. 세계 정상급 감독의 반열에 오르려면 두 방향 중 하나에서 확실한 개선을 이뤄내야 할 것이기에 그의 영화인생의 이정표는 다음 작품이 아닐까 예상한다. 개선이 이뤄진다면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영화감독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느낀 개인적 아쉬움은 꼭 짚어 얘기하기는 곤란하지만 스토리라인과 전개의 당김이 어디선가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상영시간을 조금 늘리고 당김을 조금 더 강화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보며 들었는데, 100% 주관적이고 막연한 감상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정현과 김성오 외에 세라 역의 서영희, 양선 역의 이미도, 미스터리연구소 소장 양동근 등 등장인물 모두 연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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