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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탄생설화4]동정녀 교리에 만연한 처녀 이데올로기

by 안치용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는 4복음서 중 마태·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고, 이렇듯 두 복음서 사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지만 ‘예수 동정녀 탄생’ 자체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채택되었다. 동정녀 탄생에 기대지 않은 기독교 교리의 성립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역사는 그쪽으로 물꼬를 텄고 설화의 교리화 속에서 다른 생각을 정죄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과거의 (또는 현재의) 어떤 기독교 부류는 복음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를 포함하여 많은 것들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함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육화(肉化)한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며, 신은 육화하는 방법으로 인간, 또는 다른 많은 포유류와 동일하게 잉태와 출산을 택했다. 계시의 시점과 그 공간에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하였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섭리에 따른 구체적 계획과 세세한 의도를 알 수 없지만, 2천 년 전에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 남성이란 육신을 입고 유대인인 요셉의 아들로 출생하였음은 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 탄생 8일째에 유대 전통을 준수하며 예수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두고 성서는 “네 태중의 아이가 복 있다”고 말한다. ‘태중’이 마리아의 자궁을 의미함은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마리아가 자신의 자궁에서 태아인 예수를 키우다가 날이 차서 자기 몸 안의 산도(産道)를 통해 분만하였음 또한 성서에 기반한다. 출산과 관련하여 기능적으로 산도라고 불리는 여성의 이 인체 기관은 생식과 관련하여서는 질(膣)이라고 불린다. 질에 관한 해부학적 설명은 “교미기관과 분만 시 산도를 겸한다”이며 신약성서 기술을 그대로 믿으면 ‘성모 마리아의 인체 기관인 질을 이용한 출산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성관계의 용도로는 활용되지 않았다’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자가 그렇게 쓴 데는 그렇게 써야 할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그리고 신앙적인 맥락과 배경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과거 기독교 형성기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신약성서에 넣은 정경화〔正經化〕 자체를 포함하여) 동정녀 탄생 교리를 확립한 데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 동정녀 탄생 교리를 고집하고 믿음의 증거로 이것을 믿도록 강요한다면 그러한 행태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다. 동정녀 교리를 고수하는 기독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 가운데 진짜로 이 교리를 믿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또 「사도신경」을 통해 매 주일 “동정녀에게 나시고”를 외는 기독교인 가운데 몇 명이나 진짜로 이 내용을 믿을까.


동정녀 교리는 국가·사회의 가부장제 권력과 남성중심의 위계적인 종교권력 사이의 화학작용에서 배태된 일종의 관음증이자 ‘질(膣)집착증’이다. 또는 여성혐오의 기독교 교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육화한 신(神)인 예수는, 지상에서 신(神)이자 인간이고 인간이자 신(神)인 신인(神人)이 분명하지만, 성육신하는 바로 그 순간에까지 신인 협력의 방식을 취할 이유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방식을 상상해낼 수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인류문명에서, 또 신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역사에서, 살아남고 승리한 남성우월주의 기독교에서 가능할 것이다.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가, 만연한 ‘처녀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관철한 것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동정녀 교리를 자연주의에 기댄 저급한 신앙 확증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자연주의의 ‘예외’로 설정함으로써 신성을 부여하는 논증은, 그 논증 자체가 자연주의에 입각한 것이어서 더 자연주의적이 된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자연주의가 결국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 때 동정녀 탄생에 따른 예수의 신성이 인간적 논증을 통해 인정받게 된다는 상황은 신성의 모순을 야기한다. 어린아이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황새가 가져다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급한 자연주의 논증 자체도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및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틀렸을지 모르지만, 내가 신이라면 ‘처녀막 재생 수술’을 연상시키는 기괴하고 우스운 성육신의 방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인간적이며, 따뜻한 배려와 서로를 열망하는 긍정적 성애의 사랑에 근거한 성육신을 택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신이 기꺼이 인간인 우리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수난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아진다. 신은 나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신이 내가 되었으며 반대로 나 또한 신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예수는 무엇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성육신하면서 굳이 천사를 보내고 신비스런 잉태 과정을 연출하는 유난을 떨 이유를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친부이자 친모이면 안 될 이유가 없으며, 그럼에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의 그리스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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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생아 설’, 외계인설 등


그리하여 예수 동정녀 탄생의 숨은 의미를 파헤치려는 음모론에 가까운 이설 또한 성행한다. 현재의 과학기술을 적용하면, 동정녀 탄생이 꼭 해석되지 못할 바가 아니다. 마리아의 체세포 복제를 통해 예수가 출생했다면 요셉의 생물학적 기여는 불필요하다. 과학기술이 성령이 되는 셈이다. 그 시기에 체세포 복제가 가능할 리가 없기에 따라서 ‘성령에 의한 잉태’란 또 다른 이설로 연결되는데, 외계인의 도움으로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상상과 외계인이 바로 성령이어서 예수는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또 다른 상상이 그것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의 딸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세기」 6장 2절). 동정녀 출생 교리가 외계인과 마리아의 혼외정사를 등장시키는 희화화를 초래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자체를 외계인으로 보려는 극단적 시각 또한 창안케 하고 있다. 인간에게 신이 외계(外界)의 존재임이 분명하기에 신과 외계인을 등치하는 논법은 인간이 외계인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 이후로 언제나 가장 간편한 신 이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 이해방식은 좀 우습긴 해도, 간단하게 신을 인간 세상 밖으로 쫓아낸 다음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예컨대 이신론 같은 신앙의 허위의식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고민의 결과물로 평가받아야 한다.


아무튼 과거엔 착상할 수 없던 현대적 잉태 방법을 성령과 연결 지으면서 이처럼 해괴한 상상이 난무하는가 하면, 예수 시대엔 ‘예수 사생아 설’이 유포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령에 의한 잉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요셉이 친부가 아님과 마리아가 생모임에 근거하여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를 친부로 상정하는 것 말고는 그 시대에 납득할 만한 다른 방법이 찾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예수 사생아 설’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지고 오래된 ‘친부’ 후보는 ‘판테라’라는 로마 병사다. 정혼남 요셉이 있었고, 실제로 그와 결혼하여 남편까지 두게 되는 마리아와 판테라는 무슨 관계일까. 예수 시대의 유대인 지역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음을 우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배자의 일원이자 점령군으로 식민지에 주둔한 로마 병사들이 지금의 유엔평화유지군과는 많이 달랐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마 달라도 매우 다르지 않았을까. 로마 병사에 의한 유대인 약탈과 유대 여인 강간은 드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리아와 판테라의 관계가 설정되고 그 사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주장 자체만으로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 사회에서 생존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터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초기 기독교의 생존과 확대를 싫어하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만들어내고 확대 재생산하였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라 ‘판테라 예수 친부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이런저런 증거가 제시되었는가 하면 기독교에 의한 즉각적이고 결사적인 반박 또한 이루어졌다. 이 주장은 기독교를 싫어하는 유대교도 사이에서 힘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유대교 내에서 소수 종파인 기독교가 살아남아서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악의적인’ ‘판테라 예수 친부설’이 실제로 돌았다면, 이 낭설에 맞서 싸우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데서 그치지 않고, A.D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로마군에 맞서 싸운 유대 반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마사다 항전’의 기억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 완연한 가운데 만일 유대교 소수 종파의 비조가 로마 병사의 핏줄이라면 그 종파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가 ‘판테라 예수 친부설’에 대한 필사적인 반박의 의도 아래 작성되었다면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는 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에겐 성경, 외경, 위경, 전승자료, 역사적 문헌과 예수 동정녀 탄생이라는 공식 교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제시된 역사적 예수의 어렴풋한 잔영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조명 안에서 그와 대화하며, 인간역사와 인류문명에 드리운 신의 섭리의 방향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고구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진실을 구성하고 수용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교리가 아니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조명만이 길을 찾게 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독교 교회와 교리,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조명 사이에 항상 불일치가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언제나 일치하였다고도 말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내적이고 외적인 조명이, 당대 기독교인의 믿음의 방식과 관행보다 신앙에서 언제나 우선한다는 것이야말로 개신교의 가장 큰 성취가 아닌가.


<예수가 완성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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