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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탄생설화3]누가복음, 여성관점의 탄생 설화

by 안치용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를 다룬 「누가복음」은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구성이 판이하다. 먼저 이 사건의 주인공이자 주체는 분명하게 마리아로 설정되고 「마태복음」과 달리 요셉의 역할은 거의 없다. 기독교 미술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성모영보(聖母領報)라고도 하는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마리아에게 전해진다. 성서 본문을 보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장 26~35절)

본문은 마리아와 요셉, 예수의 고향으로 갈릴리의 나사렛을 적시한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대로 나사렛 예수의 출생지는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으로 기록돼 있다. 마리아와 요셉의 출생지는 공식 복음서 상으로 확인되지 않고 그저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예수탄생교회란 이름의 오래된 교회가 베들레헴 외곽에 위치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동정녀 탄생 설화를 기록한 마태·누가 복음은 공통으로 예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이라고 밝힌다. 사전 설명 없이 예수가 그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는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잉태는 갈릴리, 출생은 베들레헴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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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간에 수식(修飾)하는 방향의 차이 또한 목격된다. 「마태복음」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누가복음」에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로 바뀐다. 이미 앞서 밝혔듯, 수태고지 또한 ‘주(主)의 사자 대 요셉’에서 ‘천사 가브리엘 대 마리아’로 변화한다.


「누가복음」의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는 성모 마리아 설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요셉에서 마리아로, 예수를 탄생케 한 주체의 변화는 단순한 관점 변화 이상의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여자는 사회적 주체가 아니었고, 따라서 사건의 합당한 증언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남자와 비교해 절대 열위의 위상을 갖는 여성인 마리아를 주체로 내세워 동정녀 탄생 설화를 써 내려간 방식에서 모종의 전복이 엿보인다. 이 부분의 서술방식에 한정한다면 일종의 페미니즘 글쓰기라고 불러도 좋겠다.


태어날 자에 대한 예언 또한 상응한 차이를 보인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마태복음」의 언명은 전문적인 신학용어를 회피하며 설명하면 상대적으로 더 구약성서적이고 더 유대교적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혼용된 설명과 함께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는 명백히 신약성서적인 천명이 이루어진다. 탄생 설화로 비교하면 「누가복음」이 「마태복음」에 비해 (유대교보다) 기독교의 관점에 더 확고하게 서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두 복음서 사이에 동정녀 탄생의 증거 방식 또한 다르다. 「마태복음」은 제3자에 의한 또는 전지적 시점에 의한 사건 기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애초에 무지한 요셉이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건의 시초부터 출산의 주체인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한다. 마리아가 분명히 묻고 천사가 대답하며 마리아의 결단과 순종이 묘사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수태 계획은 마리아에게 고지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한다. 마리아의 동의가 있었음을, 또는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에 합의(혹은 사전 소통)가 존재하였음을 「누가복음」은 표시한다. 반면 「마태복음」에서 마리아는 그저 동정녀 탄생의 매개체일 뿐이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마리아의 법적 대리인인 요셉을 통하여 사후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 ‘남자를 알지 못함’과 잉태 사이의 연관을 물은 것은 생물학적 의혹을 제기하였다기보다는 처녀의 잉태가 불러올 인간사의 파장을 마리아가 충분히 의식하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사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섭리에 몸을 맡기는 마리아는 성모(聖母)로서 기독교의 시작점이자 기독교 신앙의 모범이 된다. 조금 더 확장하여 말하면,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만 기독교는 마리아란 갈릴리 처녀를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었다. 현상적으로는 마리아 없이 기독교의 성립이 불가능했다는 의미다.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가’는 내용상으로 나중에 그의 육신의 아들 예수가 설파할 내용 그대로다. 충실한 신학적 전망과 함께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를 내리치고 비천하고 주리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적시하여 찬양한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가 천명할 기독교의 정수를 선취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장 46~55절)



<예수가 완성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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