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영화리뷰) '나이팅게일'
영화 <나이팅게일>은 이 영화를 연출한 제니퍼 켄트 감독이 말했듯 ‘폭력’을 이야기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존재를 다룬다. 형이상학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비존재로 상각되는, 또 폭력과 마주하여 헐벗은 몸으로 서 있는, 희미하고 가여운 존재를 다룬다.
19세기 호주의 태즈메이니아는
<나이팅게일>은 제75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했고, 제9회 호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ㆍ감독상ㆍ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 6관왕을 차지하는 등 여러 유수 영화제에서 51회 수상 및 노미네이트 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역사성에 입각한 냉정한 리얼리즘이 아마 호평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이팅게일>은 19세기 호주 태즈메이니아를 무대로 한다. 영국군 장교 ‘호킨스’(샘 클라플린) 일당에게 강간당하며 눈앞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은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쵸시)가 복수를 위해 ‘여자의 몸으로’ 호킨스 일당을 쫓는 추격 스릴러이다. 여기에서 ‘여자의 몸으로’란 단서는 매우 중요한데, 극중 클레어에게 많은 특성이 중첩되긴 하지만 ‘여성’은 19세기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 가장 빈약한 주체의 하나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기획할 때 클레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예를 들어 클레어가 희생당하고 클레어의 남편이 복수하는 스토리를 구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영화의 결이 매우 달라졌을 터이다.
호주 대륙 동남단의 섬 태즈메이니아는 대륙 전체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태즈메이니아 섬은 대영제국에서 운영한 유형지로 섬이 하나의 감옥이었다. 클레어는 여성죄수로 이곳에 와서 다른 남성죄수와 가정을 이루어 아이까지 낳았지만 간수에 해당하는 영국군 장교 호킨스의 성노예나 다름없이 살아간다. 기본적인 인권 개념이 미미한 시절에 식민지, 그것도 유형지에서 죄수의 인권이 존중될 리가 없었고, 따라서 형기를 다 채운 클레어 부부는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호킨스’에게 그가 약속한 추천장을 요청하지만 계속 거절당한다. 말하자면 간수 또는 지배자에 의한 자의적인 감금과 형기의 연장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영연방에서 가장 먼 곳에 해당하는 영국 식민지 호주에서 유형지, 그것도 오지의 유형지를 관리하는 영국군이 어떤 자질을 갖췄으며 그들의 군기가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간다. 최악에 근접한 영국군이 주둔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 여성죄수는 상시적인 성폭력에 노출된다. 도시의 교도소처럼 차단된 시설에 감금되지 않고 태즈메이니아처럼 오지이지만 열려 있는 유형지에 보내진 여자죄수는 (원주민을 제외한) 온갖 부류의 남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할 위험을 일상적으로 겪었을 것이다. 클레어처럼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여자죄수라면, 성폭력 위계의 상단에 있는 호킨스 같은 영국군 장교의 배타적 성폭력만 견디면 된다는 일종의 ‘보호’ 아래 놓일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의 성(性)과 몸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채 상시로 약탈당하고, 그 존재는 언제든 멸실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지점이 클레어가 선 곳이었음을 인식함으로써 영화를 감상해야 한다.
더군다나 클레어는 죄수 중에서도 아일랜드인이다. 남편도 그렇다.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오랜 갈등과 반목, 증오를 생각해 보자. 아일랜드인이며, 남편도 아일랜드인이고, 죄수이며, 여성으로, 영국 식민지 호주하고도 태즈메이니아의 오지 유형지에서 영국군 관할 아래에서 수형생활을 해야 한다. 영화 속 아일랜드 여자 죄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정도가 아니라 광풍 앞의 등불이라고 해야겠다.
‘근대 구석기 시대인’ ‘보이’의 멸절
현재 호주의 가장 작은 주(州)인 태즈메이니아는 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태즈메이니아섬과 주변 섬으로 이루어졌다. 넓이가 6만7800㎢나 되니 꽤 큰 섬이다. 1803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속령으로 유형지가 되었다가 1856년 독자 식민지가 되고 1901년 영연방에 편입되었다. ‘근대 구석기 시대인’으로 불린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공식적으로 1876년에 절멸하였다.
영화 <나이팅게일>은 태즈메이니아 역사의 단면을 묘사한다. 켄트 감독은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었는지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슬픈 역사가 지닌 폭력의 여파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졌다”고 영화의 출발점을 밝혔다. 따라서 폭력이 만연한 호주 식민지 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장소이자 가장 혹독한 시기인 1825년의 태즈메이니아가 영화의 무대가 된 것은 불가피했다. 그는 영화에서 그 시절에 충실함으로써, 즉 현대의 흔적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영화가 스스로 말하는 방식이 되도록 애썼다. 영화 속에 드러난 폭력이 지나치게 가공되지 않은 모습으로 비치길 바랐다는 켄트 감독은 그것이 그 시대에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며 폭력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유효한 관점이다.
이러한 유형의 영화를 만들 때 유의할 점은, 켄트 감독이 지적한 대로 희생자의 편에 선다고 하면서 희생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에 관련된 문제를 과거 속에서 풀어냄으로써, 현재의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공격받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는 설명은 리얼리즘의 예의와 성취에 관한 중요한 단서이다.
영화에서 클레어와 호킨스 각각의 길 안내인은 ‘근대 구석기 시대인’으로 불린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으로 상정될 것이다. 클레어의 동행인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와 호킨스의 안내인인 빌리의 삼촌은 모두 원주민으로 노령의 빌리 삼촌까지 극중에서 ‘보이’로 불린다. 영어식 표현에서 애완견을 부를 때 흔히 ‘보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상하면 되겠다. 애완견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이’이듯, 멸절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극중에서 ‘보이’로 지칭된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로 취급당해 마치 짐승을 죽이듯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고 아무렇게나 죽일 수 있는 비(非)인간의 호칭인 ‘보이’를 클레어 역시 사용한다. 태즈메이니아에서 가장 낮은 계급 혹은 계층의 인간인 클레어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 빌리 사이에 연대가 확인되는 장면은 클레어가 빌리를 ‘보이’라고 부르기를 그만두고 ‘빌리’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이다. 비(非)존재의 존재, 아무 때나 상각될 수 있는 비(非)주체, 그리고 인간임을 식별하는 근원적 조건인 자유로부터 배제되어 여성의 생식기 혹은 개를 부르듯 호명되는 그 무엇을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역사가 발전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확대되리라고 믿지만,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고 종종 당대인에게 바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퇴행을 겪으며 발전의 경로를 이행한다는 역사의 특성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슬픔을 구성한다. 어떤 고통은 끝내 치유되지 않는다. ‘호모 사케르’가 현상의 설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역사의 실증은 고통 너머에서 어떤 인간적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게 한다. 2020년 개봉된 영화 속에서 1825년 태즈메이니아 바닷가의 빌리와 클레어는 복수에 성공하고 장엄한 태양을 함께 보지만 현실의 2020년에서 빌리의 후손은 목격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감독이 그러하듯, 영화를 보며 감독의 말대로 공감할 뿐이다.
글 안치용/영회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