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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Dec 28. 2020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객사하며 꼭쥐고 있던 돌멩이.왜?

영화평(영화리뷰) '굿바이'

영화평(영화리뷰) '굿바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시작과 끝은 생명의 현상이다. 사람이란 생명체가 원해서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듯, 죽음 또한 피할 수 없다. 사람의 죽음은 망자에겐 죽음이지만 망자를 보낸 사람에겐 삶이다. 타키타 요지로 감독의 영화 <굿바이>는 죽음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원제가 ‘Departures’이다. 이 영화가 죽음을, 출발 혹은 떠남보다는 배웅으로 해석하기에 한국어 제목 ‘굿바이’가 ‘Departures’보다 더 적절해 보인다. 누군가를 배웅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삶의 맥락을 짚어보게 된다는, 평범하지만 뜻깊은 깨달음 같은 걸 담으려고 노력한 영화다.   

  

죽음으로 낮아지기     


영화 <굿바이>는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는 장례지도사라는 특이한 직업을 소재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한 따뜻한 드라마이다. 영화에서 일본의 고유 장례 문화를 소화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일본인이 아닌 관객에게는 죽음에 접근하는 특이한 관점이 제시되어 흥미로웠다. 나아가 죽음에 관한 모종의 통찰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확보한 진지한 영화라고 해야겠다.


<굿바이>는 여러 이항대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의미를 산출한다. 도쿄에서 첼로연주자로 활동하던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가 갑작스런 악단 해체로 아내 ‘미카’(히로스에 료코)와 고향 야마가타로 돌아간다. ‘연령, 경험 무관! 정규직 보장!’이란 여행사 구인 광고를 보고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 장례지도사였고, 그 여행사는 일반적 여행이 아닌 인생의 마지막 여행인 죽음을 배웅하는 장례지도회사였다.

여기서 이미 두 가지 이항대립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이항대립인 도쿄와 야마가타는, 도시와 시골, 타향과 고향 등으로 변형된다. 영화에서 귀향은 자연스럽게 죽음과 관련된다. 죽음이 일종의 귀향이란 비유가 성립한다. 다이고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간 다이고의 아버지 또한 객사라는 외형상의 죽음 형식과 달리 실제로는 내용상 귀향의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죽음은 귀향인 것이다.


도쿄와 야마가타라는 공간의 이항대립은 첼로연주자와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에 근거한 다른 이항대립으로 넘어온다. 번듯하고 화려한 직업이지만 재능이 없고 만족하지 못하는 첼로연주자(도쿄)를 그만둔 다이고는 비천하고 무시당하는 직업이지만 재능과 보람을 발견한 장례지도사(야마가타)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여기에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등 더 많은 이항대립이 정교한 그물망을 만들어내며 영화를 완성한다.


‘첼로’는 분열하는데, 도쿄의 첼로연주자가 생계 목적으로 남을 위해 연주하는 ‘외향적’ 연주자였다면, 야마가타의 첼로연주자는 단지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내향적’ 연주자가 됨으로써였다. 이러한 첼로의 분열은 오히려 연주를 위한 연주가 야마가타에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봉합되고 고양된다고 말해야겠다. 첼로는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자관계를 해명하는 데 핵심 소재이다. 첼로에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절망과 고통이 투사된다. 죽음과 함께 회복되는 부자관계를 말하자면 첼로가 연주해낸다.     


부자와 남녀     


첼로의 분열은 외형상으로도 확인된다. 도쿄에서 사용한 고가의 연주용 첼로는 저렴한 야마가타의 연습용 첼로로 대치된다. 그러한 전락은 첼로연주자에서 장례지도사로 직업이 추락하는 것을 방불케 하지만 전락이 전락이 아니라 상승일 수 있음을 영화는 전한다. 죽음이 모든 것의 무의미한 마감이 아니듯이 말이다.


연습용 첼로 케이스에는 다이고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돌편지’가 들어있다. 돌편지는 영화를 지탱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건네준 돌을 받아들고서 돌을 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돌편지는 영화의 마지막 이항대립이다.

이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향의 돌아가신 어머니 집에 사는 다이고 부부에게, 다이고가 어릴 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가정을 버린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평생 거두지 못한 다이고는 장례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내의 설득으로 객사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간다. 예상대로 장례지도사인 다이고는 염습 등 직접 아버지의 장례를 진행한다. 그리고 죽은 아버지의 손에 꼭 쥐어진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사후경직으로 굳은 손가락을 펴자 거기서 작은 돌멩이가 하나 떨어졌다. 어린 다이고가 아버지에게 준 돌편지였다. 


죽음을 통한 화해, 죽음을 통한 상호이해 혹은 소통이 일어나는 대미는 작은 돌멩이 하나로 성취된다. 어느 정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적당한 긴장과 복선을 통해 시종을 느슨하지 않으면서 유장하게 풀어낸 영화였다.

부자라는 이항대립은 삶과 죽음에 관한 본원적 이항대립을 뜻한다. 본원적 슬픔이기도 하고, 삶을 이해하는 핵심키이기도 하다. 삶은 매시 매초 죽음으로 치닫지만 죽음은 언제나 다른 듯 같은 삶으로 연장되기 마련이다. 죽음의 의식이 배웅이라면 그것은 결국 나를 떠나보내는 의식이다. 


너무 무게 잡지 않고 삶과 죽음을 밀도 있게 형상화한 이 작품에 흠결이 있다면, 꼭 장례를 다뤄서라기보다는 일본 문화에 깊숙이 내재한 가부장제의 그늘, 즉 여성의 소외가 너무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 대목이 종종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글 안치용/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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