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불러들이고 있는 햇볕을 한참을 쬐게 되면 이유를 모르겠지만, 한 나절이 더 지나 한밤에 잠에서 깨어난다. 꽃이 질 때 슬퍼하였지만, 낙화의 애잔한 기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둑길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분홍색 가루처럼 무상하다. 늦봄 변덕스러운 바람 불면 하늘에 떠올랐다가 시간이 지나 갑자기 내 꿈속을 어지럽힌다.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연한 녹색의 아기 손을 내게 흔든다. 도시의 매연을 배경으로 플라타너스는 늘 큼지막하고 거친 초록색의 잎들로 뒤덮여 있었다. 낮에 본 그 잎은 정맥이 드러난 인간의 손처럼 햇살 아래 미성숙한 잎맥이 완연했다.
언젠가 어느 여자 아이가 제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처럼 햇살이 눈부신 날이 아니라 눈발이 날리는 과거 포근한 어느 날, 아마도 어느 날의 밤, 지금 그 아이 또래의 남자는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눈이 많이 내리면 늘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은 그게 너라고.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썼을 법한 그런 내용이다. 당연히 이메일이 아닌 종이 편지를 보냈다. 서랍 속에서 흐릿하게 바래진 물화한 사랑은 잊힌 채 여전히 호명을 기다린다.
요즘에서야 지난 사랑은 사랑이 지났어도, 세상 어딘가에 결코 없어지지 않을 디지털정보로 남아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불멸의 사랑이 된다. 결코 바래지 않는 현존으로, 핸드폰 하나로, 약간의 노고로 옛 사랑은 플라타너스 잎맥보다 더 생생하게 눈앞에 소환될 수 있다. 햇살 감당하기 힘들게 찬란한 날, 너는 0 아니면 1 밖에 없는 저쪽 세상에서, 늙지 않은 그날의 존재로, 늙어가도 최상의 존재로, 영원히 물화하지 않으며 불멸의 사랑을 기록한다. 우리 사랑은 바래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다. 다만 외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