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특징 중에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모성 같은 것은 포유류에서 거의 보편적이니 여기서는 성애에 기반한 사랑에 국한하자. 이 사랑이 인간다움의 핵심적 특징으로 지목되기에, 사람들은 생명종 중에서 인간만이 사랑이란 걸 하는 유일무이한 종이라고 단정하기를 좋아한다. 보노보나 늑대 등 인간 외에 사랑에 근접한 행태를 보이는 생명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종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번식에 최적화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유성생식으로 치부된다.
인간 또한 종족 보존은 물론이고 사랑까지 기본적으로 유성생식의 구조에 의존하고 원형으로 받아들이지만, 적어도 인간의 사랑엔 포유류를 비롯한 동물 세계의 번식과 판이한 기제가 작동한다고 의미화한다. 다른 동물에 정말로 사랑이란 게 없는 건지, 인간의 사랑이 다른 동물과 분명하게 구별되는지는 솔직히 전적으로 확증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증명이라기보다 믿음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혹시 우리가 사랑이라고 예찬하는 감정과 행태가 소위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종에 최적화한 번식법을 분식한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그런 의문이 불가능할까. 사랑과 섹스가 다르고, 또한 섹스와 번식이 다르다고들 말한다. 성애에 기반한 사랑에서 섹스는 그 표징이 된다. 본래 목적인 번식은 회피하되 전래의 번식행위 자체엔 강박적으로 몰두한 문명화한 인간의 섹스라는 게 동물성의 탈피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의 동물성 고착은 아닐까.
의문은 나아가 불안의 씨앗이 된다. 인간다움이란 것이 우리 주장과 달리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 인간이란 고유한 존재가 없고, 리처드 도킨스이 말한 대로 그저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만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크게 보아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 식의 설명에, 이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논외로 하고, 많은 사람이 불쾌한 감정을 표명한다. 인간이 ‘확장된 표현형’이라면 사랑은 그저 광대일 테니 말이다.
숭고로까지 격상하는 사랑의 배후에서 인간을 은밀하게 지배하는 DNA의 위엄에 우리가 무지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무지가 아니라 외면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신앙을 닮았다
모성을 최종심급으로 찬양하고 지구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인간은 포유류다. 동시에 동물이라는 확정된 사실 너머에서 동물과 다른 선험적으로 무언가 존엄한 존재일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일 때 성립한다. 존엄한 존재로, 다른 존엄한 존재와 독점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생물학 너머의 일이다.
인간이 포유류임은 증명되지만 더불어 존엄한 존재라는, 생물학 너머의 증명은 쉽게 확보되지 않는다. 솔직히 믿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에 가깝다. 그러므로, 가장 진실한 사랑은 신앙과 닮았다. 두 개념이 모두 초월을 전제로 성립하는 심리 메커니즘인 까닭이다. 둘 다 실재하긴 한다. 해명되지 않지만 실재한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외부인의 관점으론 더 없이 유치하거나 비합리적이지만, 그 안에 휘말린 사람에겐 심오하고 황홀하며 관점에 따라선 더 없이 합리적인 지경으로 간주된다는 데에 두 개념이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진다.
영화 <노트북>은 동화 같은 작품이다. 사랑의 천부적 권위와 사랑하는 사람의 선험적 존엄을 달콤하게 증명한다. 동화 같다는 설명은 클리셰가 많이 발견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된다. 아이가 반복해서 동화를 읽듯이, 어른과 달리 스토리의 변용을 싫어하고 같은 스토리를 좋아하듯, 어쩌면 사랑은 철두철미한 클리셰이다. 클리셰가 사랑의 격하를 뜻하지 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은 보편성의 영역에 속한 감성이어서 나이 신분 등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에서 보듯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거의 동일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느낀다는 얘기다.
<노트북>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가 홍보 포인트로 활용된다. 홍보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사랑의 논의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영화에서 원작이나 실화 같은 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보편적인 혹은 상투적인 사랑의 구조에서 영화가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트북>에서 17살의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동갑내기 노아(라이언 고슬링)는 서로를 첫사랑으로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한다.
예상대로 두 주인공 사이에 신분격차가 있다. 앨리 부모의 반대가 사랑의 난관으로 등장하고, 일단, 아직 너무 어린 두 사람이 타의에 의해 헤어진다. 각자 상대와 무관한 삶을 살다가 엇갈린 삶에도 불구하고 7년만인 24살에 재회한다. 강제 이별 후 1년을 매일 앨리에게 편지를 쓴 노아의 모습에서 관객은 사춘기나 그 이후에라도 겪었을 첫사랑의 열병을 기억할 법하다. 첫사랑, 신분격차, 사랑의 방해꾼, 이별, 재회, 막강한 연적의 등장, 사랑의 결승전, 사랑의 확인과 쟁취 등 사랑 서사의 전통적 요소가 <노트북>을 빼곡히 채운다.
나열된 요소들은 영웅서사와 로맨스를 설명하는 비평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로맨스의 서사에서는 먼저 사랑이란 낙원이 제시되고 이어 추방이 일어난다. 연인 사이의 갈등이나 외부의 시련으로 인한 격리의 단계 또한 등장한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며, 사랑의 희망을 품고 계속 나아간다. <노트북>이 잘 그려내었듯이, 구원 혹은 결합이 로맨스의 결말인 건 당연하다.
러시아의 예술이론가 블라디미르 프로프가 말한 민담 혹은 옛이야기의 31가지 기능이나, 이것을 압축하여 영화 서사에 맞춰 설명한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은 더 명확한 구조화를 꾀한다.
‘영웅의 여정’은 ▲일상 세계(Ordinary World) ▲모험의 부름(Call to Adventure) ▲거부(Refusal of the Call) ▲조력자와 만남(Meeting with the Mentor) ▲첫 번째 관문 통과(Crossing the First Threshold) ▲시험, 동료, 적(Tests, Allies, and Enemies) ▲접근(Approach to the Inmost Cave) ▲중대한 시험(The Ordeal) ▲보상(Reward) ▲돌아오는 길(The Road Back) ▲부활(The Resurrection) ▲엘릭서(Return with the Elixir)의 12개로 구성돼 개수가 많은 프로프 이론보다 자주 인용된다.
많은 팬이 이 영화를 ‘인생 로맨스’로 꼽는다. 그 이유는 스토리가 시원하게 풀려나가고 국면 전환이 빠르지만 내내 로맨스의 핵심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플로차트에 들어갈 요소를 모두 채워 넣어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보글러의 ‘영웅의 여정’의 요소를 모두 채웠다고 ‘인생 로맨스’가 되지는 않는다. 요소마다 사랑의 심리나 감정을 잘 버무렸기에, 즉 디테일을 살렸기에 영화팬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매력은 시작과 끝에 집중해 극을 전개한 데서 생긴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사랑한 기간은 별로 길지 않다. 17살의 짧은 첫사랑의 열병과 헤어짐, 24살의 재회와 결합은 구조상 액자영화에 가깝다. 동시에 본 줄거리이기도 하다. 여기에, 치매에 걸린 앨리와 그를 옆에서 지키며 옛날 그들의 사랑을 회고하는 노아 두 사람의 인생 끝자락이 따라붙는다.
회고는 구성상 부수적 줄거리가 돼야 하지만, 의미상으론 그렇지 않다. 두 노인은 같은 날 밤에 함께 늙어 죽는다. 선형으로 배치하지 않았고, 별개처럼 구성했지만 하나인 이 이야기에서 빠진 것은 시작과 끝 사이의, 더는 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평범하며 때로 지루한,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삶이다.
플래시백으로 구성하여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외양을 취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청춘의 사랑이 열매를 맺는 장면으로 끝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마무리한 셈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영화가 ‘인생 로맨스’로 각인됐다면, 동화에서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선언만 하고 행복의 실체를 생략한 것과 달리 영화에서 그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행복한 결말에서 열정적인 시작을 추적한다. 결말까지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의 선언을 작정하고 보여준 연출은 또 다른 동화적 진술이다. 실화에 바탕했다는, 결과를 제시하는 동화적 진술에 따른 행복의 실체의 제시는 착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의 사랑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만큼 감독은 같은 시간에 죽는 마무리 설정을 통해 관객에게 그러한 인상을 심어준다. 두 사람 사랑의 실제 삶이 불행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행복한 부부의 삶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순간의 기쁨과는 다르다. 엄밀하게 그것은, 종종 사랑을 완전히 배신하기도 하는, 사랑에서 파생한 삶이다. 즉 둘은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감정이자 삶의 양태이다. 닉 카사베츠 감독은 다른 두 개를 교묘하게 엮어서 전체로서 하나인 것처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보글러의 ‘영웅의 여정’의 마지막은 엘릭서(Elixir)를 지니고 돌아오는 것이다. 엘릭서는 마법의 약이나 불로장생의 약을 뜻한다. 연금술에서는 생명을 연장하거나 모든 병을 치유하는 신비의 물질로 간주했다. 서사에서 엘릭서는 상징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영웅이 모험을 통해 얻는 귀중한 보상으로, 물질적인 것일 수 있지만, 지혜, 통찰 같은 추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는 사랑이다.
<노트북>이 영웅서사라면 영웅은 남자 주인공인 노아로 여겨진다. 가부장제에 입각한 서사라는 비판이 가능해 보이는데, 모르는 척 넘어가 줘도 되지 싶다. 가부장제 시대의 사랑을 그렸기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어리는 걸 피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 영화에서 사랑이 엘릭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여러 후보 중에 나는 영화 제목이기도 한 ‘공책’이 가장 강력한 엘릭서 후보라고 생각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는 노아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공책을 전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걸 나에게 읽어줘요.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돌아갈게요(Read this to me, and I'll come back to you).”
여기서 당신이 누구인지 자명하다. 카사베츠 감독은 인생의 종점에서 앨리가 최고의 전리품을 얻는 것으로 설정한다. 생성된 배경이나 화자, 시기 등을 감안할 때 노아에겐 공책이 확실히 엘릭서이다. 시작과 끝을 관통함으로써 사랑의 존엄을 그리고자 한 제작진의 의도는 노아의 화답에 해당하는 다음 대사를 통해 달성된다. 요양원에서 아버지(노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집에 돌아오라는 자녀들의 요청에 대답한 말이다.
“너희들 엄마가 내 집이야(Your mother is my home).”
사랑이라는 기적
사람들은 사랑에 흔히 운명이란 단어를 결부시키기 좋아한다. 애매한 결부이다. 운명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주체적 관여 없이 사랑의 운명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아가 앨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앨리가 노아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은 그 집 앞을 서성이거나 과거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걷는 등 무의식적으로 운명에 자신을 매어두려는 욕망에 근거함으로써 운명이 된다.
사랑의 기적이란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사랑 자체에는 기적이 깃들지 않았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 연인에게 기적이 일어날 뿐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지적하였듯 신앙과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기적을 믿을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필연적 추락이 자신에게만 유일하게 예외일 것이라는 비합리성을 믿고 추앙한다는 점 자체부터 기적이다. 기적 없는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그런 믿음을 지녀서 얼마나 다행인가. <노트북>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교묘하게 기적으로 연출한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