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 란(Uprising)>
음악이나 문학에서 사용하는 기법 중에 대위법이 있다. 대위법은 주로 음악에서 쓰임새가 커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결합하는 기술이다. 결합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은 당연하다.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하는 기법을 이르는데 음악만큼 의의가 크지 않다
영화 <전, 란(Uprising)>을 보며 처음에 대위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두 캐릭터의 대응을 시구처럼 맞추려고 애쓴 걸 보고는 대구법을 생각하고, 비슷한가 하면 대조적이어서 대조법까지 적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엔 뚜렷한 두 개 흐름이 있어서 이러한 기법에 의한 구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대립하는 캐릭터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이다. 양반댁 도련님과 노비로 함께 성장한 무신 집안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써 내려간 역사물이다. 대조적인 두 캐릭터가 영화의 두 흐름을 이끈다. 앞선 기법 얘기를 마무리 지으면 대위/대구/대조가 모두 사용되지만 결론적으로 대위가 가장 강하다. 김상만 감독이 두 흐름을 결합하고 조화하는 결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전, 란>이란 제목 자체에 기법의 혼융이 들어있다. 제목을 쉼표를 찍지 않고 ‘전란(戰亂)’으로 했으면 크게 보아 하나의 흐름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쉼표를 찍어 구분했다. ‘전’은 전쟁일 테고, 란은 ‘반란(反亂)’일 가능성이 크다. 비록 전란이란 단어로 묶이긴 하지만 전쟁과 반란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반란에서 핵심은 반(反)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반(反)’ 장이 나온다.
전쟁과 평화는 대조에 해당하나, 전쟁과 반란은 대위를 염두에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과 반란은 서로 무관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두 개념은 나중에 주제에 해당하는 다른 개념으로 만난다. 영어 제목 ‘Uprising’은 그저 반란이란 뜻이다. 한국어와 비슷하게 작명했다면 <Up, Rising> 같은 것도 가능했겠다고 상상해본다.
중심 캐릭터 천영과 종려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둘이 ‘동무’였다가, 적이 되고, 대미에 다시 동무가 되니 말이다. 처음의 동무와 나중의 동무는 다르다. 나중의 동무는 소위 변증법적으로 고양된 동무이다.
영화를 선조 때의 선비 정여립(1546~1589년)과 함께 시작한 것은 오락물에 사회성을 담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대동계’를 만든 정여립이 남긴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고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는 말은 당시로선 파격을 넘어 반역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영화의 주제는 처음에 제시된 대동이고 소박하게는 동무이다. ‘전’과 ‘란’을 통해 동무에 이르니 대위법과 비슷해 보인다.
임진왜란
극의 구조를 두 캐릭터의 대립이 아니라 얼핏 그 이상으로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선조(차승원)와 왜장 겐신(정성일)의 영화 내 비중이 제법 크니 말이다. 그러나 선조와 겐신은 ‘전’과 ‘란’의 전선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조선은 분열한다. 선조와 종려는 전쟁보다는 반란을 진압하고, 천영과 김자령(진선규)ㆍ범동(김신록) 등은 왜구와 전쟁을 치른다. 반란과 전쟁은 종전 후에 반란으로 합쳐진다.
파천 등 선조의 행태는 당대뿐 아니라 현재를 포함한 이후 역사에 겹쳐져 블랙 코미디로 기능한다. 백성을 강가에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도강하면서 뒤의 길을 끊은 모습은 한국전쟁기의 이승만을 떠올리게 한다. 비유로 받아들이면 민중은 개 돼지라는 그 유명한 발언을 포함해 더 많은 장면이 스친다. 정여립의 대동 사상과 선조 등의 신분제 사상의 대립은 종려 집안에서도 목격된다. 종료 말고는 아무도 종료와 천영의 교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겐신까지 합세한 종려와 천영의 3자 대결은 대단원이자 대동의 장면이다. 여기서 누가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영화는 오락성 못지않게 사회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사회성이 오락성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됐다는 혐의를 거둘 수 없다. 크게 흠은 아니다. 오락성과 사회성이 잘 어울렸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보물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칭찬하고 싶다. 도강하는 선조의 배 위로 잘려 떨어진 민초의 많은 손가락과 잘 호응한다. 블랙 코미디로 처리한 게 더 좋은 감각이었다.
겐신의 죽음 방식을 예언하고 나중에 어떻게 구현할지 궁금했는데 한 수(手) 더 나간 흥미로운 처리였다. 정여립의 죽음과 겐신의 죽음을 같은 모습으로 연출한 데는 ‘전’과 ‘란’을 합일하는 또 다른 지점이다. 이 지점의 사유가 약간 착잡하다면,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탈춤 장면의 희망 제시는 발랄하고 가볍다. ‘짐승’이 왕(王)을 먹어치우는 장면은 왕(王)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비(非)한자권 관객에겐 다가가기 힘들겠다. 사극에다 ‘King’이라고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 OTT 영화인 <전, 란>을 개막작으로 한 게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반상의 구별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