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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문

마리아의 판테라 유복자 입양기

by 안치용

형기를 마치고 요셉은 아버지와 약속한 대로 아메리카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알아본 대학에 입학했으며, 그가 사전에 마련해 놓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았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다음엔 로스콜에 진학해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기로 돼 있었다. 요셉으로서는 생각하거나 결정할 게 없어서 오히려 편했다. 유학 생활 동안 한국인은 되도록 만나지 않았다. 실상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요셉은 이 또한 아버지의 섬세한 배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이래저래 한국어 이름이 필요 없기에 개명의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아메리카에선 다른 많은 한국 유학생이 그러하듯 요셉은 본래 이름 대신 새로운 아메리카식 이름을 사용했고, 귀국해선 성에다 직함을 붙여 불렸기에 바뀐 이름으로 불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름 기반의 관계가 끝나 있었지만, 아버지가 성까지 바꾸진 않았기에 존재가 유실되지는 않았다. 어쩌다 바뀐 이름으로 호명되면 요셉은 잠시 자신인 줄 모르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곤 했다. 바뀐 이름이 아버지의 성을 달고 주민등록증이나 학교 홈페이지 등 자신이 평소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영역에서 또 다른 자아로 활보하는 것에 요셉은 익숙해졌다.


그가 아메리카 체류 중에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가에 관한 감각이 흐려졌다면, 반대로 자신 몸의 감각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요셉의 아메리카 유학은 앙드레 지드의 북아프리카 여행과, 비록 원인과 과정이 달랐지만 결과가 같았다. 성적 지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나이도 비슷했다. 아메리카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에게 제법 인기가 많은 발랄한 게이의 삶이 펼쳐졌다. 유형에 처하듯 던져진 아메리카여서 성 정체성을 두고 갈등할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몸이 내는 신호를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마약에도 손을 댔다. 그러고 싶었다기보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추방당하다시피 아메리카에 도착했지만, 흔히 상상할 법한 절망이나 좌절, 혹은 타락이나 자포자기에서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이어서 더 자유롭고 순수하게 그는 자신과 자신의 몸, 그 몸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방인의 삶을 시작한 걸 마음 저변에서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받아들였기에, 아메리카 체류로 기초적인 면벌부를 획득했다는 정당화 논리가 작동한 듯도 했다. 천연덕스럽게, 늘 그렇게 산 것처럼 새로운 삶을 즐겼고 그 삶에 젖어 들었다. 이런 세상을 열어준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까, 요셉에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큰 흐름을 잡아주는 것 말고는 아버지가 요셉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학업을 게을리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아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적당한 수준 이상으로 학점을 받는 한 아버지가 개입할 일이 없을 터였다.


관용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무관심과 계약에 가까운 무언의 약속으로 유지된 평화가 깨졌다. 요셉은 굳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마음이 없었지만, 미국 체류 중 한 번 평화의 조건을 파기했다. 물어본다고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요셉이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전공을 바꾼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 진학시 법학 대신 영문학을 선택할 때보다 이번이 설명하기에 더 막연한 감이 있으면서 동기는 더 뚜렷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해서 로스쿨에 진학하고 아메리카 변호사가 된 다음 귀국해서 한국에 자리를 잡는다는, 아버지의 진로 설정에 반감을 가졌던 건 아니다. 귀국하면 아버지가 알아서 해줄 것이고, 귀국하지 않고 아메리카에 남아도 아버지가 알아서 해줄 것이기에,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큰 장점이었다. 살인자가 된 이후, 살아지면 그만이지, 쭉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아버지에 맞서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신학을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이 공부하기로 한 건 학생회관에서 주검으로 만난 그 청년 때문이었다.

The Wrestler Onogawa Kisaburō Blowing Smoke at a One-Eyed Monster (1865) Tsukioka Yoshitoshi (Japanese, 1839-1892).jpg The Wrestler Onogawa Kisaburō Blowing Smoke at a One-Eyed Monster (1865) Tsukioka Yoshitoshi

사건 이후 편리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를 완전히 잊었다.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을 즈음에 그가 요셉을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 금세 떠났지만 더러 며칠 머물 때가 있었다.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힘들고 생활에 차질을 빚을 정도로 자주 출몰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를 만나는 게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를 회피하려고 술과 마약, 섹스에 탐닉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환각 파티를 벌인 게 아니라 그게 좋았다.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그의 방문은 쾌락과 별개였다. 쾌락과 공존하는 불쾌였다. 불쾌와 고통이 섞인 느낌.


학생회관 동아리방 옆의 창고에 누워있던, 얼굴이 조금 뭉개진 채 숨을 쉬지 않던 청년. 그가 잊을만하면 요셉 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머릿속을 오랫동안 조현병 환자처럼 걸어 다녔다. 문이 닫혀 있으면 전기드릴로 구멍을 내고 머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럴 땐 연가시처럼 가늘고 길게 침투했다. 위층에서 거구의 생명체가 광분하는 소리에 코카인에 취한 침대에서 한밤중에 눈을 뜨면, 층간소음을 뚫고 죽은 청년의 얼굴을 한 트롤이 온 체중을 실어 요셉의 가슴께로 뛰어내렸다.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가 아니었지만, 결국 떨치거나 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런 상태가 지속하면서 요셉은 아메리카에 와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참회나 구원 같은 거창하거나 방정한 발상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귀의하기로 한 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요셉은 차라리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단지 아버지가 준비한, 세속의 기준으로 잘 나가는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그 청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다른 한편으론 죽은 사람에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반론을 더 설득력 있게 수용했다. 그랬다. 그 청년은 죽었고 요셉은 어쨌든 살아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 없이, 미미한 죄의식조차 없이 남보란 듯 번듯하게 사는 것에 사실 요셉은 전혀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예정된 아마 그리 나쁘지 않을 삶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져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알리바이가 그에게 있었다. 진상을 따지고 들면 요셉이 살인범이긴 하나 그가 죽이지는 않았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붕어빵이라고 부르다 보니 어느 사이에 붕어가 밀가루 반죽 속으로 뛰어들어와 있었다.


청년은 죽었지만, 그의 얼굴을 달고 간헐적으로 천정 너머에서 뛰어내리는 트롤이 요셉을 자신을 살해한 사람으로 믿었다. 문제는 마음의 취약성이었다. 정신이 그릇이라면 요셉의 것은 라면 한번 끓이고 버려지는 한강 고수부지 편의점의 얇은 알루미늄 그릇 딱 그 수준이었다. 트롤에 맞서 결백을 주장하기에 요셉의 정신이 너무 허약했다. 무엇보다 요셉은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지 못했다. 천공으로 두개골이 울렸고 가슴으로 뛰어내리곤 했기에 그 부위에서 통증을 느꼈다. 마약 때문에 그러나 싶어 마약을 끊어봤지만 똑같았다. 마약을 늘리면 트롤이 떠날까 싶어 더 많은 종류에 더 많은 양을 흡입하고 더 많이 주사를 맞았다. 똑같았다.


위층에 트롤이 살지 않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트롤에게 뭔가 물러갈 명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귀의하는 모양새가 트롤에게 만일 떠날 마음이 있다면 떠날 명분에 해당한다고 믿었고,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준비된 길에서 가장 먼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트롤에게 성의를 표시했다는, 더없이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없었기에 트롤에게 건네는 일종의 합의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독단으로 학교와 전공을 바꾸었을 때 은연중에 아버지로부터 버려지는 상황을 기대했다. 그런 상황을 아마 트롤은 흡족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절연은 없었다. 어머니를 통해 준엄한 경고가 전해진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아들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요셉이 그때는 몰랐다. 곧 옮긴 학교 부근에서 혼자 살기에 과분한 주거지가 물색되어 요셉에게 열쇠가 전달됐다. 학교를 자퇴하고 외항선에 탔다면 모르겠으나 학교와 전공을 바꾼 건 요셉다운 너무 소심한 반항이었다. 그전과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상 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까지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제시됐다. 신앙과 무관한 삶을 산 것은 깡그리 무시됐고 전과의 동기를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초기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계획이 있었다. 아버지와 요셉 사이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 유물론자였는데, 아버지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그가 유신론자가 되면서 부자 사이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 사라졌다.


트롤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이사했지만, 예상대로 새 집으로 트롤이 따라와 야반도주를 응징하려는듯 아예 안방에 드러누웠다. 하는 수 없었다. 곁을 떠나지 않는 트롤과 요셉은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떠나지 않으니 친구로 지내는 게 합리적이었다. 피하지 못한다고 즐길 마음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요셉은 신학을 공부하는 데에 그가 좋은 벗이 될 것이라는 근사한 생각까지 떠올렸다. 목사 안수를 받을 즈음엔 하나님이 계시를 주는 방법이 트롤이었다고 믿기로 했다. 손으로 목을 조르면 졸리고, 발로 차면 맞고,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면 뚫리면서 친구로 빙의해 지내다 보니 점점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트롤로서도 무기력한 상대에 염증을 느낀 듯했다. 심지어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문득 기다려질 때가 있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기는 했다. 요셉은 트롤에게 스티븐도 방문하느냐고 물었지만 이상한 걸 묻는다는 표정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스티븐에게는 그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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