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판테라 유복자 입양기
적어도 요셉에게는, 환대 같은 단어로 그의 아내 행동이 100% 석명되기 힘들었다. 아내 때문이 아니라 알라나 야웨의 무조건적 축복을 믿지 못하는 시건방진 양키 병사 같은 그 때문이었다. 태도나 원칙의 껍질을 벗겨내고 행동의 고갱이를 재물대에 올려놓고 현미경을 들이대면 순수한 환대 외에 트적지근한 불순물이 들어있음을 확인할 것이라고 요셉은 예상했다. 경멸이라는 불순물. 환대에 경멸이 마블링처럼 섞여 들어갔다고 판단한 근거를 아내보다 요셉에게서 찾아야 할 텐데, 그는 ‘우습게도 그 단어를 제목으로 쓴 소설과 영화가 마침 묵시처럼 떠오른 게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그 제목이 그의 뇌리에서 팝업처럼 터진 이유가 불명확했다. 요셉은 아내의 태도에서 어떤 경멸도 감지하지 못했다.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따뜻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가 서늘함에 불현듯 뒤돌아보았더니 소파 뒤쪽의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요셉에게 경멸의 팝업이란 것이 등장한 경로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보고 있는 TV 모니터 안이 아니라, 보고 있지 않은 뒤편 유리창 밖에서 팝업했다. 한번 강설을 확인한 다음엔 TV 모니터 안에 햇볕이 짱짱한 열대의 해변이 나오더라도, 실내가 아무리 따듯해도, 냉랭한 습기가 서서히 소파를 점령하게 된다.
경멸한다.
그 소설과 달리, 그 한 마디를 아내가 실제로 그에게 내뱉은 적이 없다. 그 한 마디를 명시하는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아내가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고 행한 적이 없는, 주어가 생략된 그 단어. 살면서 가끔, 얼마나 가끔인지 모르지만, 가끔, 요셉은 떠올렸다. 어느 날 아침에 기상 알람을 대신해 그 말이 뇌 속에서 울려 잠에서 깨었고, 서명이 들어간 책받침 여신의 사진인 양 그 단어를 이름처럼 위에 휘갈겨 써넣은 아내의 이미지가 머리 안에서 밤새 공명했다. 책받침 모서리가 닿으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간헐성 알람과 발작성 공명과 함께 뇌주름 사이를 축축하게 핥는 아내의 예리한 혀를 느꼈다. 모세의 것보다 길고 재바른 아내의 혀에 묻은 침의 점도가 높았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로, 명사가 아닌 용언으로 표출됐다. 겉보기에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고 주어가 빠져 있다는 형식상 흠결을 빌미로 공명한 이미지를 주어로 강제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것은 요셉에게 흠결 있는 문장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괄호를 첨부한 그 자체로 완성된 문장이었다. 토라진 분위기의 용언은 그를 무시하는 듯 미끈한 촉수를 달음박질치듯 어디로인가로 되바라지게 뻗었다. 그는 촉수의 끝을 찾아 뇌 주름 사이를 헤맸다. 끈적이는 침이 범람 직전의 수위로 차오른 깊은 뇌주름의 계곡에서 요셉이 찾아낸 건 아내의 혀끝이 아니라 소설 『경멸』의 주인공 리카르도 몰티니였다. 그와 악수하려고 요셉이 손을 내밀자 상대가 어느 사이에 몰티니가 아니라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로 바뀌어 있었다. 스메르쟈코프는 요셉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일에 집중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스메르쟈코프가 간질 발작을 결행하려고 입수하려는 참이었다. 요셉은 뇌막을 뚫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존재를 알아챘지만 그가 누군인지를 알 수 없었다. 촉수의 끝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고 스메르쟈코프가 눈을 불안정하게 뜨며 목적어를 경련했다. 요셉의 허파 꽈리를 채운 기체를 끈적한 액체가 밀고 들어와 방울방울 몰아냈다. 익숙한 혀끝에서 문장이 점점이 흘러내렸다.
입이 아파.
요셉의 아내가 입이 아프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그녀는 단지 입이 아프다고 말했다. 단지 입이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소설 『경멸』의 에밀리아가 했듯이, “경멸한다”를 발설했으면 요셉의 마음이 덜 아팠을까. 그의 아내가 그의 마음이 아파지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성격상 감정이나 의도, 의견이 배이지 않은 순수 사실을 다만 사실로 진술했을 터였다. 감정이나 의도, 의견보다 사실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가 있다는 걸 마리아가 알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요셉은 인정했다.
화자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발화를 거치며 청자에게 생겨나기도 한다. 현실에선 무엇인가가 생각보다 많이 생겨난다. 없던 무엇인가가 생성하기도 하지만 이미 있던 무엇인가가 발화를 통해 발견되어 확인되기도 한다. 후자의 발화는, 밤에 방의 전등 스위치를 누른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든다. 잘 모르는 공간이라면, 전원을 켬으로써 어두운 방에 숨어 있던 무엇이든 튀어나올 수 있다. 전원을 켜지 않았다면 기꺼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을 무엇인가가 하는 수 없이 튀어나온다. 생성과 튀어나옴은 화자와 청자 모두를 겨냥한다. 발화한 내용 자체는 물론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까지 화자와 청자 사이의 소통에 들어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입이 아프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마리아의 입이 아팠다. 고래 등에 작살이 꽂히고 그 작살의 밧줄이 풀려나가면서 순식간에 에이해브 선장의 목을 감아버리는 장면처럼, 살다 보면 사실이 모든 것을 삼키는 장렬한 순간이 있다. 뇌주름 계곡에 일렁이던 침이 사방으로 범람했다.
마리아와 결혼한 유일한 이유가 마리아가 전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는 각성이 마침내 요셉에게 확고해졌다. 머릿속에서 전처가 될이란 문구가 스크린의 자막처럼 한 번 지나가자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자막 없이 여러 번 봐도 들리지 않던 외국영화의 대사가 자막을 본 후엔 선명하게 들린 현상과 비슷했다. 꽤 오랜 기간을 식물성 남편으로 살면서 또 사실상 별거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면서 요셉은 이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아도 그랬다. 그들 생각에, 그들은 사이가 나쁜 부부가 아니었다. 외려 사이가 좋은 부부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동안 이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이제 문득 부부의 관계를 굳이 지속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이 개안하듯 요셉에게 떠올랐다. 오래전에 작성된 계약 해지통지서를 본 느낌이었다.
마후의 연인을 재로 만들었으니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수순이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과 자신의 이혼은 완전히 별개 사안이라고 요셉은 믿었다. 요셉에게 그런 연상은 후안무치했다. 단지 현상들이 인접했을 뿐이다. 하지만 높은 인접률을 우둔한 사람들은 인과율로 받아들인다. 어떤 인접에 어떤 인과가 담겼는지는 마침내 신만이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모두 결국 우둔한 사람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긴 하다. 현상 사이에 어떤 인과가 있는지를 외부 도움 없이 식별하기가 원천적으로 글러 먹었다면 인간이 인과 여부를 스스로 정하기로 결심하는 수밖에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신은 하늘, 인간은 땅에 있다는 20세기의 어느 저명한 신학자의 일침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인과의 판정을 묻기에 신이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얘기에 종종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왜일까. 인과여서 인과인 것이 아니라, 인과이어야 하기에 인과라는 얘기를 받아들이는 게 너무 비참하기 때문일까. 비참해지는 습관을 지닌 요셉은 다행히 인접에서 인과를 찾아낼 만큼 삶에 의욕적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 그들의 결혼은 그녀에게 확고한 미래이고 지켜야 할 가업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예상한 것보다 엄청나게 이른 시점에 그것도 아름답지 못한 소문 속에 세상을 떠난 뒤로는 사실 그녀가 그 결혼을 지켜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의 장인의 죽음과 함께 결혼의 의의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요셉에게 가해진 무언의 압박 또한 사라졌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세상으로 떠난 이후에 그들의 헐벗은 결속이 이미 풀린 상태였지만, 그들은 그동안 그 상황을 모른 척했다. 다른 많은 부부에서 그러하듯, 혼인상태를 계속할 특별한 사유를 찾기 힘들었지만 계속하지 않을 사유 또한 찾기 힘들어 유지된 사이였다는 게 그 부부에 관한 정확한 진단이었다. 특별히 나쁠 것도 좋은 것도 없는 무난한 결혼생활. 그러다가 아무런 예감 없이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 요셉에게 계시처럼 도래했다. 마리아가 차려준 아침 식사는 계시를 확인하는 종교적 의식과 흡사했다고 요셉은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