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국내 개봉 30주년을 맞아 재개봉하는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멜로 영화이다. 에로 영화라고 해도 좋다. 멜로 영화라고 할 때 멜로의 어원은 그리스어 멜로스((μέλος)로, ‘노래’, ‘음악’, ‘선율’을 뜻한다. 멜로 영화의 느낌을 짐작할 수 있다. 에로의 어원은 에로스(Ἔρως)로 ‘사랑’, ‘성적 욕망’, ‘갈망’을 뜻하며, 그리스 신화 속의 ‘사랑의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에너지나 생명력의 의미로 활용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는 ‘에로틱 멜로’ 영화라는 절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에로든 멜로든 이제 이 영화는 이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에로와 멜로 영화의 범주를 넘어선다.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라스베가스의 그림자 속에서,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한 남자와 지독한 고독에 잠긴 한 여자가 만나 완성하는 사랑과 사랑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았다.
알코올 중독의 병리적 증상을 영화 언어로
영국 소설가 맬컴 라우리의 기념비적 작품 『화산 아래서』가 알코올 중독자의 의식의 흐름을 선보였듯, 피기스 감독은 알코올 중독의 고통스러운 증상들을 의학 정의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영화 기법을 통해 관객의 망막에 직접 이식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블랙아웃(Blackout)이다.
의학에서 블랙아웃은 알코올이 뇌의 해마를 마비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기억 단절’ 상태를 의미한다. 영화는 극의 흐름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암전을 삽입해 주인공 벤(니콜라스 케이지)의 끊어진 시간의 틈을 시각화한다. 관객은 암전의 순간에서 벤이 느끼는 당혹과 알코올 중독자의 현실적 공포를 공유하게 된다.
고농도 알코올의 과다 섭취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패싱 아웃(Passing Out)’은 벤에게 일상인 물리적 몰락이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들이 비장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수중 촬영이나 몽환적인 조명을 활용해 의식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따라간다. 육체적 파괴조차 하나의 탐미적 미장센으로 승화한다.
‘진전섬망(Delirium Tremens)’은 핸드헬드 카메라로 이어진다. 알코올 중독의 금단 현상으로 나타나는 심한 떨림과 환각 상태인 ‘섬망’은 영화의 기술적 특징과 긴밀히 연결된다. 35mm가 아닌 거친 입자의 슈퍼 16mm 포맷과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섬망을 겪는 중독자의 불안정한 시선 그 자체다. 낮은 해상도와 거친 질감은 라스베가스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영육의 부식을 직설적으로 때로 암시적으로 드러내며 벤의 흔들리는 내면을 투사한다.
소외된 인간들이 마주한 심연과 사랑
알코올 중독자 벤과 거리의 여자 세라(엘리자베스 슈) 사이의 사랑은 사회적 생산성이 완전히 거세된 인간들이 생의 한계선상에서 나누는 절박한 몸짓이다. 벤은 알코올을 통한 ‘느린 자살’을 선택한 남자이고, 세라는 자본의 논리에 육체가 철저히 소비되는 소외의 극단에 선 여자다. 이들의 만남에는 희망이 없다. 정확히 말해 희망을 모색하지 않는다.
서로를 구원하여 다시 사회로 복귀하거나 복귀시키려는 이른 바 재활의 의지가 없다. 서로가 각자의 파멸 속도를 유지한 채 절벽 끝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 행위다. 투신을 막으려고 하지 않고 투신할 때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준 온기로 남고자 한다.
라스베가스: 떠남의 주체와 공간의 상징성
영화의 제목인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는 당연히 공간 이동을 뜻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라스베가스를 떠나지도 않는다. 벤에게 라스베가스는 (세상을) 떠나기 위해 찾아온 목적지다. 그는 이미 LA라는 생산적이고 세속적인 공간을 떠나 온 상태다. 그가 라스베가스를 다시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생의 마지막 보루에서 존재 자체를 소거하는 행위, 즉 죽음을 통한 완전한 퇴장을 의미한다. 라스베가스는 삶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거대한 소각장과 같다.
라스베가스에 거주하며 몸 파는 일상을 이어가는 세라에게 떠남은 더욱 은유적이다. 그녀는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하지만, 벤과 사랑을 나누는 동안 자신을 옥죄던 비인간적인 노동의 굴레와 정서적 고립으로부터 떠나 있게 된다. 심리적 이탈이자 비아냥거리면 정신승리 식의 힐링이다. 벤의 죽음 이후 그녀가 홀로 남겨졌을 때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을 좀먹은 끔찍한 삶을 정신적으로 떠나 보내고 과거를 청산하여 주체로 거듭날 것이다. 아마도.
화려한 네온사인과 인공적인 빛으로 가득한 라스베가스는 역설적으로 아무도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휘발되는 이 도시에서 두 사람이 나눈 교감은, 이 허무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떠나지 않을 모종의 진실이 된다. 제목의 현재진행형(-ing)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멈추지 않고 수행해야 했던 상실과 이별의 과정을 상징한다.
"Do you want my help?
영화의 종막에서 세라가 “내가 도와줄까?”라고 묻지만 벤은 거부한다. 전체를 매조지는 이 대사는 이 영화가 정의하는 사랑의 결정체다. 여기서 ‘구원’과 ‘응시’가 충돌하며 완성되는 사랑의 방정식을 발견한다.
세라의 "내가 도와줄까(Do you want my help?)"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멈추게 하고 싶은 인간적인 본능이자 사랑의 일반적 양태이지만, 동시에 상대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개입’이다. 그러나 이 도움은 때로 상대를 내가 원하는 상태(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로 고착하려는 기의의 위협이 된다.
“아니, 난 너를 (그저) 보고 싶어(No, I want to see you)."
벤의 이 답변은 영화의 모든 기법이 지향한 ‘응시’의 미학을 완성한다. 벤은 자신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세라라는 존재를 자신의 흐릿한 시야 속에 담아두기를 원한다. 여기서 ‘본다’는 행위는 상대를 소유하거나 변화하려는 욕망이 제거된, 순수한 기표로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자살 방조인가, 급진적 존중인가
세라의 행위는 세속적 관점에서 자살 방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의 관점과 여성학 맥락에서 세라의 ‘비개입’은 매우 전복적인 주체성을 띤다. 전통적인 영화 문법, 또는 삶의 문법에서 여성은 파괴된 남성을 갱생하는 성스러운 구원자 역할을 수행한다. 세라는 벤을 고쳐 놓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가부장제의 상투적 요구를 거부하고, 벤의 ‘죽어갈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창녀인 세라에게 세상은 늘 정상성을 강요하며 그녀를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세라는 벤의 중독을 있는 그대로 두는 방식을 통해, 사회가 정의한 ‘올바른 삶’의 궤도 밖에서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세라의 사랑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일과도 같다. 벤이 선택한 파멸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이 벤의 본질이라면 그 고통까지도 자신의 시야 안에 담아낸다. 방조가 아니라, 한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끝까지 응시해 주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환대다.
대상화한 몸에서 주체적인 시선으로
누구에게도 온전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했던 세라는, 역설적으로 자신보다 더 무너져 내린 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벤의 "I want to see you"라는 말은 소비되는 몸으로만 존재한 세라에게 ‘전시되는 상품’이 아닌 ‘응시되는 존재’의 자격을 부여한다. ‘응시되는 존재’는 ‘응시하는 주체’의 대구로 성립한다. 벤은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 포획하지 않고, 그저 존재로서 바라보며 세라가 잃어버렸던 인간적 존엄을 회복시킨다.
수잔 손탁은 예술 작품을 지적으로 분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작품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경고했다. 세라가 벤을 대하는 방식이 바로 이 해석에 반대하는 시선의 정수다. 그녀는 벤이 왜 술을 마시는지, 어떻게 하면 그를 ‘정상’ 범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를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손탁이 제기한 응시의 윤리는 이 영화에서 완성된다. 세라는 벤의 고통을 동정의 대상으로 소비하거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도구로 삼지 않는다. 그녀는 벤의 파멸을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타자의 고통에 연민이라는 이름의 ‘가짜 구원’을 덧씌우지 않는다. 고결한 윤리의 실천이라고 말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적어도 ‘가짜’는 아니다. 이들의 사랑은 해석되지 않기에 더욱 투명하고, 규정되지 않기에 영원한 기표로 남는다.
파멸조차 축복이 되는 응시의 순간
영화는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두 사람이 머무는 모텔의 남루한 어둠을 끊임없이 대비한다. 라스베가스의 조명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누구의 고독도 비추지 못하는 가짜 빛인 반면, 벤과 세라가 나누는 어둠 속의 시선은 서로의 심연을 비추는 유일한 진실이다.
스팅의 허스키한 음색은 이 고립된 공간의 밀도를 채운다. ‘Angel Eyes’, ‘My One And Only Love’ 등의 재즈 선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긴 자리를 메우며,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청각적으로 치환한다. 음악이 멈추고 벤의 거친 숨소리만 남는 순간, 영화는 사랑과 실존의 가장 내밀한 고갱이를 드러낸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365일 취해 있는 벤의 복합적인 내면을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표현해내며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엘리자베스 슈 또한 세라를 통해 비극적이고 희생하는 여인이 아닌, 스스로의 고독을 벤의 파멸과 결합하며 강인한 주체로 표명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스팅의 음색으로 소화한 ‘Angel Eyes’ 등의 곡들은 두 사람 사이의 슬프면서도 따뜻한 유대를 청각적으로 변주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사랑이 상대를 소유하고 변화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심연을 묵묵히 지켜보며 지지하는 응시임을 웅변한다. 벤과 세라는 서로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서로의 유일한 위로가 된다.
"도와줄까?"라는 물음에 "그저 당신을 보고 싶다"고 한 벤의 대답은 심오한 사랑의 방정식이다. 파멸의 끝에서도 서로를 시야에서 놓지 않았던 그들의 응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포획되지 않는 기표처럼 자유롭고 슬픈 사랑의 진의를 관객의 가슴에 새긴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