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드 사마리안>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배드 사마리안> 포스터ⓒ (주)영화사 빅
영화 <배드 사마리안(Bad Samaritan)>은 스릴러물이다. 범죄 혹은 사건을 중심으로 한 스릴러물에서 기본 형식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치이다. 보통 관객의 마음속에는 사이코패스적인 가해자와 무고한 피해자란 대립구도가 자리 잡는다.
<배드 사마리안>은 스릴러의 이러한 기본문법에 충실하다. 배급사에서 "호흡곤란" 스릴러라고 친절하게 소분류를 붙여놓았을 정도다. 실제로 '호흡곤란 스릴러'인지에 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부수적' 메시지, 혹은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스릴러의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할리우드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배드 사마리안>에서 초점은 영화 안이 아니라 영화 밖에서 찾아진다. 영화로 구현된 스릴러물이 영화 밖에서 제기한 인간 윤리와 존재라는 보편적 문제. '배드 사마리안'이란 제목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대 사마리아인
딘 데블린 감독의 <배드 사마리안>이 내어놓은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마리아와 성경에 관한 사전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기독교의 공식문건인 4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복음에서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볼 수 있다. 예수와 율법교사가 대화하는 형식을 취한 누가복음 10장의 이 이야기를 대화체로 새롭게 구성해 보았다.
율법학자 : (예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 : (율법학자에게) 율법에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율법학자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 맞습니다. 그렇게 행하십시오.
율법학자 :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율법에서 말한 "네 이웃"이 누구인가요?
(이때 예수는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 예화를 든다)
예화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떼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처했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그는 정신을 잃고 피투성이로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유대교의 제사장이 제일 먼저 이 현장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못 본 척 현장을 피해갔다. 이어 현장을 지나치게 된 레위인 또한 피해자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세 번째로 등장한 게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라.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더 주겠다"며 주막을 떠날 때 돌봄을 당부하였다.
예수 :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 : 자비를 베푼 자(사마리아인)입니다.
▲영화 <배드 사마리안> 포스터ⓒ (주)영화사 빅
예수의 이 예화에서 당연히 주인공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지만, 예수나 율법학자가 이 대화에서 신경 쓴 것은 사마리아인이 아니었다. 제사장, 레위인, 누가복음에서 예수와 문답한 율법학자, 그리고 예수까지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래 한 민족이었으나 팔레스타인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동안 앗시리아 등 이민족의 침략을 겪으면서 점차 사이가 나빠져 대립하다가 예수 시절엔 서로 이민족과 다름없이 대하였다. 유대인이 갈릴리 등 북쪽으로 여행하게 되면 사마리아 땅을 피해 아예 동쪽으로 우회할 정도로 유대와 사마리아의 사이가 나빴다.
이 예화는 곤경에 처한 유대인의 이웃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으며, 나아가 율법을 지킨 이 또한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말한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로 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에 종사했다. 성전의 최고계급인 제사장과 성전 봉직자가 곤경에 처한 동포를 외면하고 지나간 반면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사마리아인이 구제를 행했다고 예수가 유대 율법학자에게 이야기한 장면이다.
물론 예화이지만, 율법학자에겐 예수가 제사장과 레위인을 지목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 유대의 엘리트집단을 욕보이려 했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예수가 이 예화에서 로마인도 아니고 그리스인도 아닌 굳이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데는 유대 사회 지배계급의 위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실제로 개입하였다고 추측하여도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예수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율법학자에게 그가 속한 지배세력의 위선과 민중에 대한 배신을 일깨운 셈이다. 듣는 이에겐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고, 동시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 <배드 사마리안> 스틸컷ⓒ (주)영화사 빅
유럽 등지에서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이나 피해가 돌아오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의 위험을 보고도 구조하지 않고 방치하는 자"를 처벌하도록 한 '착한 사마리아인 법'까지 등장케 한 누가복음 이 예화의 주인공은 살펴보았듯 따라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예수에게도 '이 예화에서' 사마리아인은 타자화한 존재로 그저 동원될 뿐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예외적 현상이다. 원래 사마리아인은 이방인 못지않게 혹은 이방인 이상으로 사악해야 정상이다. "착한"이란 수식어를 통해 드러나는 의미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며 그러므로 하나의 고유명사('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용된다. 또한 "착한"이란 수식어는, 그 사마리아인을 사실상 사마리아인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주술로 보아야 하며, 응당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속했어야 할 그 수식어가 그들에게 붙어있지 않게 하였다는, 이중 배제의 기호이다.
반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나쁜 사마리안(Bad Samaritan)'에서 "나쁜"은 중복에 불과하기에 불필요하다('하얀 백조'란 표현을 떠올려 보자). 물론 강조의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더 그럴 듯한 해석은 유대인에게 "나쁜"이 사마리아인의 본유 속성으로 간주되기에 불필요한 중복의 수식을 통해 사마리아인을 보통명사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나쁜 사마리아인'은 없다. 사마리아인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얀 백조'는 과잉된 표현이지만 '백조가 하얗다'고 쓸 수는 있다).
'배드 사마리안'은 없다
데블린 감독은 연출의도의 하나로 인간윤리의 조명을 거론하면서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양심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배급사는 홍보자료에서 "영화 <배드 사마리안>의 '사마리안'은 괴로워하는 사람에 대한 자비, 친절을 비유하는 뜻으로 '당신이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가, 나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관객이 스스로 자문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다.
'사마리안'을 오독함으로써 "당신이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가, 나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가"와 같이 당황스런 질문이 자동으로 생성된 상황은 애교로 넘어가도록 하자. 식당의 발레파킹 주차요원으로 일하면서 발레파킹을 이용해 주차를 맡긴 사람의 집을 터는 극중 주인공 션(로버트 시한 분)은 빈집털이범이다.
"마세라티를 타고 온 손님의 집을 털다가 그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되고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되는 극한의 호흡곤란 스릴러"를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케일(데이비드 테넌트 분)과 대립하며 이끌어간다. 데이비드 테넌트는 <닥터후>의 그 데이비드 테넌트이다.
여기서 '배드 사마리안'이 비록 그 어휘의 어미가 '사람'을 뜻한다 하여도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가 얼핏 불분명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극중에서 곤경에 처한 여인(케리 코논)을, 주인공 션은 누가복음 10장의 제사장과 레위인과 달리 못 본 체 지나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구조하려고 하였기에 그는 누가 봐도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션이 빈집털이범인 건 영화전개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엔 큰 흠결은 아니다. 성경에선 구조라는 행위에 주목했지, 구조자의 신분에 주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션이 (상대적으로 사소한) 범죄를 통해 케일의 (상대적으로 극악한) 범죄를 인지하였다는 사실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하는 션을 곤경으로 몰아넣는다.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 모델은 스릴러물의 구조를 취하지 않았기에 피해자와 구조자(그리고 구조를 회피한 자)만 나타나지 범죄자(도둑떼)는 생략돼 있다.
▲영화 <배드 사마리안> 포스터ⓒ (주)영화사 빅
영화 <배드 사마리안>은 스릴러물이기에 잔혹한 범죄자와 피해자들(무고한 피해자와 그의 구조자로 등장하였다가 점차 피해자가 되어간 상대적으로 덜 무고한 피해자가 연합하여 맞선다)이 꼭 필요하다. 이러한 '장르'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곳에서 모두 누가 '착한 사마리아인'인지를 식별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결국 영화 <배드 사마리안>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배드 사마리안'은 어디에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감독이 의도적 혼동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맥락상 '배드 사마리안'은 '착한 사마리아인'인 션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한(사실 그는 영화 시작과 함께 이미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션 또한 빈집을 터는 범죄자라는 사실에서 "배드 '착한 사마리안'"을 설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배드 '착한 사마리안'"에서 최종적으로 '착한'이 탈락한다. 이 탈락은 논리로는 오류지만 시장감각에선 나쁘지 않았다. 또는 큰 고민 없이 애초에 마케팅 차원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대구로 '배드 사마리안'을 떠올렸을 것이란 또 다른 합리적인 추측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영화 밖에서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유대인의 관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등을 짬뽕하여, 인간 존재의 디폴트 값은 '사마리안'(뭐 '배드 사마리안'이라고 해도 상관없다)이고 결단이든 무엇이든 모종의 계기를 통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제목과 달리 영화는 '스릴러답게' 전개되기에, 혹여 제목에 마음을 빼앗겨 흐름을 잃지 않는다면 '괜찮은 할리우드 영화 한 편 봤구나'하며 극장 문을 나설 수도 있지 싶다. 노파심에서 다시 확인하자면 이 영화는 스릴러물이다.
10월 18일 개봉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