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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Nov 25. 2021

과학무기와 OSRD

OSRD는 과학연구를 진전시켜 전쟁의 승리를 만든 무기체계를 개발했다.


OSRD : 미국의 승리에 기여하다

인간의 모든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릎써야만 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전투의지를 불태웠지만, 참호전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끔찍한 죽음 뿐이었다. 참호전이 발생한 서부전선에서 10개월만에 100만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승자인 프랑스도 한 세대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죽어 큰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똑같은 참상이 일어나면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병들의 피해를 막을 것인가?

장병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전장에서 적군에게 더 많은 피해를, 아군에게 더 적은 피해를, 그리고 적군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꺾어야 했다. 따라서 OSRD는 강력한 화력의 무기체계를 발전시키고, 젊은 장병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방어체계를 발전시키고, 적의 전쟁 의지를 꺾을 무시무시한 전략무기를 발명했다.


OSRD 연구부

OSRD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많은 부분의 연구를 지원했다. OSRD 산하 19개의 연구부가 각각의 분야를 맡아 미군의 무기체계 발전을 위한 과학 연구를 지원했다.


OSRD가 탄생시킨 무기 체계들

전쟁이 끝날때까지 OSRD는 많은 무기체계 개발에 관여했다. 다음은 OSRD가 개발에 관여한 무기체계들이다. OSRD가 발명한 무기체계들은 많은 미군의 목숨을 살리고,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다.


네이팜 - 강력한 화력 무기

미국은 네이팜을 발명했다. 네이팜은 매우 높은 온도에서 연소하여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웠다. 미국은 네이팜을 이용해 화염방사기와 소이탄을 만들었다. 미군 병사는 화염방사기로 벙커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하고, 소이탄 폭격으로 적국의 군수물자 공장을 제거할 수 있었다.


지뢰탐지기, 레이더, 근접신관 - 방어체계

미국은 전자기학의 연구성과를 적용해 지뢰탐지기, 레이더, 근접신관을 발명했다. 지뢰탐지기는 육군 병사가 지뢰에 희생당하는 것을 막았고, 레이더는 일본제국 전투기의 기습을 대비하도록 도왔고,  근접신관은 일본제국의 카미카제 공격을 막았다.


원자폭탄 - 전략무기

미국은 당시의 첨단 과학기술을 융합해 원자폭탄을 발명했다. 일본제국은 이미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전의지를 계속 불태웠다. 전쟁이 지속된다면 승자인 미국도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일본제국의 항전의지를 꺾기위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경험한 일본제국은 전쟁의지를 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젊은 장교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사실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에는 뛰어난 과학자와 공학자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몇몇 과학 분야는 독일과 일본이 미국보다 뛰어난 부분도 있었다. 독일에는 양자역학의 아버지인 하이젠베르크가 제국물리연구소를 이끌었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운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미국은 과학 기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OSRD의 성공요인

미국은 OSRD를 통해 과학기술인들의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었다. 독일과 일본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과학 기술을 가장 잘 이용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OSRD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연구 독립성을 확보했다.

영국의 경우 과학연구에 처칠과 장군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래서 몇몇 과학연구는 지체되거나 폐기되었다. 반면, OSRD는 과학자들의 통제를 받았고, 결국 근접신관을 만들 수 있었다. 근접신관은 연구개발비용이 매우 컸기 때문에 평시에는 진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근접신관이 개발되어 해군에 배치되자, 미 해군은 근접신관의 도움으로 일본제국의 카미카제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둘째, 과학자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MIT 공과대학 학장을 지냈던 버네바 부시와 OSRD에 속한 과학자들은 과학계의 인맥을 총동원해 연구개발에 가장 적합한 연구소와 연구자를 설정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자들의 징집시기를 연기하여, 무기 개발에 가장 적합한 인물들이 마음껏 과학 무기를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버네바 부시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오펜하이머를 연구 총책임자로 추천했고, 오펜하이머의 추진력으로 원자폭탄 개발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셋째, 연구 스타트업을 지원하여 그들의 연구성과를 활용할 수 있었다.

OSRD 혁신적인 기초 기술을 개발한 민간 연구소들을 지원했다. OSRD 지원을 받은 연구 스타트업은 기초 기술로 무기체계를 개발할  있었다. 연구 스타트업인 MIT Rad Lab 정부의 지원을 받아 레이더를 개발했고, Johns Hopkins APL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근접신관을 개발했으며, Caltech JPL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형 미사일을 개발할  있었다. 이들 연구소는 OSRD 지원을 받아 성장했고, 2 세계대전 끝난  현재까지도 미국의 과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넷째, 빠른 연구 개발을 위해 국가의 역량을 집중했다.

OSRD는 필요하다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과학연구를 가속화했다. 1942년 5월 23일 원자폭탄을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OSRD는 미국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미국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든다는 첩보를 듣고, 독일보다 늦게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 실전배치에 성공한다.


다섯째, 중복된 연구를 피하기 위해 연구방법을 통합했다.

OSRD는 기초 과학 연구부터 실전 적용까지 무기체계 개발의 전 과정에 관여했다. 효율적인 연구개발을 위해 가장 적합한 연구소에게 연구 과제를 주었고, 비슷한 연구가 중복되지 않도록 연구 과제를 배분했다. 다른 국가들은 육군과 해군이 따로 기술개발을 했지만, 미군은 OSRD를 통해 통합된 과학 무기체계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의 걱정이 현실이 되다...

1941년 12월 7일, 버네바 부시가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되었다. 미국 본토가 외국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다. 1783년 미국이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로 약 15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범인은 독일이 아니었다. 추축국의 일원인 일본이 미국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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