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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Jun 28. 2022

의지의 일본인 : Z 작전

일본이 오판을 의지로 극복하려 한 결과 미국의 분노를 샀다.

진주만 습격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했다. 일본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제로센 전투기가 공습한 것이다. 미국 해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군인 2,334명 사망, 1,143명 부상

민간인 103명 사상

전함 4척 침몰, 1척 좌초,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항공기 188대 상실, 159대 손상


대체 왜 일본은 미국을 기습한걸까? 이야기는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야심을 품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오판과 만행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실패 이후 약 400년간 이루지 못했던 숙원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1910년(경술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점령한 것이다. 일본은 성공에 취해 자신들이 마음껏 아시아를 주무를 수 있다는 오판(misjudgement)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오판은 중국을 침략하는 행위로 드러났다. 1938년 선전포고 없이 중화민국 군대를 기습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국공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중국은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다. 중일전쟁 초기에는 일본의 중국 점령 계획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상황은 일본이 생각한 것과 반대로 흘러갔다.


경제 제재 : ABCD 포위망

중국 대륙에 이권이 걸려있던 세계 주요국들은 일본의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 4개 국가가 일본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를 “ABCD포위망”이라 부르며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경제 제재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일본이 핵심원자재를 미국으로부터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경제는 석유의 약 80%이상, 고철의 약 70%이상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사정 따윈 신경쓰지 않고 점차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8년부터 일본에 대해 군수용 물자에 대해 수출금지 조치를 내렸다. 1939년엔 미일 경제협력조약을 폐기하고, 1940년에는 일본에 대한 수출제한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일본의 군사적 도발이 커지는 것을 막기위해 1941년 8월 원유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석유가 끊긴다면 일본에 경제위기가 닥치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총력전 연구소의 경고

일본은 자신을 압박하는 미국에 증오를 품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승리 가능성을 연구하는 총력전 연구소를 만든 것이다.

일본 정부는 젊고 똑똑한 학자들을 모아 미국과의 총력전 상황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치열한 토론 끝에 젊은 학자들은 미국과의 총력전에서 일본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인 도조 히데키를 자극했다.

일본의 총리 도조 히데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이 어떤 민족인가? 아시아의 전통적 강자 청나라와, 유라시아 대륙에서 떠오르는 강자 러시아를 꺾은 민족 아닌가? 도조 히데키는 정신력을 생각하지 않은 연구자들을 꾸짖었다.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 1884 ~ 1948)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탁상공론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예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즉, 제군들의 연구는 의외성을 고려하지 못해 완전히 신뢰하기 힘든 것이다.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제군들은 연구의 결과를 외부에 경솔하게 알리지 말라.


일본의 지도부는 총력전 연구소의 경고를 뒤로 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해군의 한 군인은 절망감에 빠졌다.


의지의 일본인 : Z 작전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 1884 ~ 1943)

해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었다. 하버드에서 공부했던 그는 미국의 생산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강력한 생산력을 가진 국가는 많은 물자를 소모하는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에 비해 생산력이 약한 일본은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야마모토는 일본 패망의 운명을 깨기 위해, 미국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미국과 싸울 것이라면 미국이 싸울 준비를 하기 전에 강력한 선제공격을 하는게 나은 선택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일본을 공격하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전쟁 시작 전에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궤멸시킬 수만 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미국이 다시 태평양 함대를 재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것이다.

미국은 추가적인 공격을 막기위해서라도 일본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 것이고, 그동안 우리는 중국과 동남아를 손쉽게 점령하여 미국과 장기전을 치를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야마모토는 선제공격이라는 도박에 베팅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1940년 야마모토는 "Z 작전"을 구상하여 부대를 훈련시켰다. 그의 준비는 철저했다. 스파이를 보내 진주만 상황을 파악하고, 수심이 얕은 진주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어뢰를 개량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하들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훈련했다.야마모토는 진주만과 비슷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모의훈련을 시켰다. 모의훈련에 참가한 뇌격기 조종사는 실력이 늘어, 명중률이 70%에 도달했다.

준비를 끝낸 일본함대는 11월 26일 진주만으로 출발했고, 12월 6일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들을 기습했다. 일본의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은 일본이 생각한 것과 반대로 흘러갔다. 분노에 찬 미국인들이 유화정책 대신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치욕의 날 (Day of Infamy)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진주만 폭격을 보고받고 굳은 표정으로 의회에서 연설한다.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에, 미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급작스럽고 고의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볼 때, 공격이 몇 일 혹은 몇 주 전에라도 신중히 계획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사전에 계획된 이 공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국민은 정의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본인은 의회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 이후 미국과 일본 제국 간 전쟁 상태가 성립되었음을 선언하기를 요청합니다.



1941년 12월 8일

워싱턴 D.C.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루즈벨트의 연설이 끝나자,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투표로 부쳤다. 선전포고는 반전주의자인 Rankin 하원의원을 제외한 모두의 지지를 받아 의회를 통과했다. 루즈벨트가 의회를 통과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하자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이 시작되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 (Remember pearl harbor)

전쟁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청년들이 징집되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라”를 외치며 군에 자원입대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장병들은 자원입대자였다. 특히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자원입대자들로 구성이 되었다.

미국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태평양함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의 생각대로 미국은 당장 일본과 싸울 전력이 충분치 않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대체 미국은 어떻게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  미국은 과학의 힘으로 기습이 주특기인 일본을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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