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살에 경단녀가 되었습니다.

"경단녀가 되었다고..내 인생이 단절되진 않아!"

by 도쿄짱상


경단녀

18년간 잘 다니던 대기업을 스스로 사직서를 내기까지 제일 무서웠던 단어이자,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서 제가 감당해내야 할 몫이 였습니다.



누군가는 쉽게 이야기 하더군요, 주재원 마누라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될 수 있는 거라고 부럽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퇴사 결심이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태어나 처음 선택이라는 것을 해 보는 것같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살면서 대학, 직업, 결혼과 같은 중차대한 이런 저런 선택을 분명 해왔는데 그동안의 삶의 선택지는 물흐르듯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퇴사라는 선택은 손에 쥔 것을 내려 놓아야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2002년 광화문에서 빨간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그 여름에 S그룹 43기로 입사했습니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화학 제조업에 더구나 일어일문학이라는 대학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해외영업부서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24살의 패기로 제 딴에는 마치 제 피가 파란색이라도 되는 양 직장 생활을 했었네요. 누가 알아주던 말던 회사에 대한 로열티도 높았고, 해외 거래선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내심 뿌듯하기도, 또 적성에도 잘 맞아 꽤나 열정적으로 회사 생활을 했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18년간 대한민국의 조직의 여성인력으로서 '80년생 김지영'님과 같은 다채로운(?) 일들을 이야기하자면 또 밤을 새야겠지만, 다음 회차를 위해 아껴둘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남편과 그룹 신입사원 교육으로 인연이 되어 만났고, 지금 11살이 된 우리 아이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어린이 집에서 키워줬으니 저에게 있어 회사라는 곳은 제 2의 가정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24살 신입사원으로 역삼동 본사로 출퇴근 할때는 말이죠 지방 출신인 제가 서울의 강남 테헤란로를 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는 것이 마냥 좋았고요, 경기도 의왕으로 사옥이 옮겨지고서는 회사 초입의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걸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봄에는 알록달록 튤립으로 시작해 화사하게 벚꽃이 피고 지고, 가을에는 멋진 단풍이... 마지막 출근을 했던 날도 어쩌면 그렇게 예쁘던지요.


특히나 제가 하루 일과 중에 애정했던 시간은 아침 출근길 사내 커피 전문점에서 사원증을 찍고 사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만나게 되는 직장 선후배들과의 가벼운 안부와 농담으로 하하호호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만의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왠지 다들 저를 좋아해 주는 것 같고, 저도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분명 이렇게 긍정적인 마인드로 18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이 직장생활을 해왔던 저였기에 제 커리어 계획은 적어도 50대까지는 이 페이스로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때가 되면 부장도 달고, 팀장도 되고 또 버티고 버텨서 하늘이 도와 대기업의 임원까지도 된다면 참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뜻밖의 글로벌 정세가 순항 중이던 제 인생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바로 일본의 전 아베총리 덕분(?)에 남편이 갑자기 일본에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인생의 아이러니는요, 제가 18년 전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할 때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민들레 영토라는 스터디 카페에서 남편에게 영어의 알파벳이라고 할수 있는 일본어의 히라가나부터 제가 가르쳤다는 사실이예요. 남편 일본어를 가르켜서 주재원 만들었으니 평강공주라고 해야하나요. 정말 이런 것이나비효과라고도 하겠지요? 처음에는 아베상이 제 커리어를 망치고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제 팔자를 제가 만든 것이더라구요.


꼭 남편이 일본으로 간다고 제가 퇴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선택지가 있었지요. 주재기간은 3년, 아이와 제가 한국에 남아 아이는 그냥 한국 공교육을 받고 저는 현재의 커리어를 유지할 수 도 있었고, 과감하지만 국제학교 교육을 위해 아이만 일본에 보내는 방법도 살짝 고려도 해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인데 맞벌이 가정에서 독립적으로 자라 준 아이이기도 하고 일하는 엄마를 참 자랑스러워했기에 퇴사를 고민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혼자 갈 수 있다고도 이야기해 준 멋진 아들이거든요. 근데 그런 말을 하면서 아들 눈에서 눈물이 또로로록 흐르더라구요.


아마 작년 이 맘때였는데요, 하루 걸러 생각은 자꾸 바뀌고 이렇게 생각해봐도 저렇게 생각해봐도 답답하고 매일 밤 어찌나 울었는지, 그 때 감정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감독님이 큐 싸인만 주면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제 커리어도 저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이에게 온 인터네셔널 스쿨에서의 경험의 기회를 애미된 자로써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아 더 두려운 일본 방사능 먹거리로 부터 아이의 건강도 지켜줘야 할 것도 같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택의 기로에서 찐 고민을 하면서 제 인생의 전체라고 할 수 있었던 대기업 차장의 커리어를 대체할 제 인생의 꿈과 대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2020년 2월 일본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꿈과 비전, 사명 이런 크고 멋진 말들로 저 스스로를 설득해 일본 땅에 도착했지만, 스스로 선택한 퇴사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드는 자괴감이 한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마치 내가 터프한 조직생활에서 여자로써 유리천장에 부딪쳐 힘들어서 결국 도망쳤던 것은 아닐까,

내 커리어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결국 이 선택을 하게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껌딱지처럼 따라 붙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미 선택하여 진행되고 있는 일에 패배자처럼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껌딱지는 떼어 버리고 우선 도쿄에서의 3년의 생활 꿈을 향한 매일의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지금 시작 할수 있는 일들을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응원합니다.


"경단녀가 되었다고..내 인생이 단절되진 않는다"


40여년간 시도하지 못했던 시도할 수 없었던 것들에 작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서 매일 한 발자국씩만 나아가는 것이다. 나의 인생 경력 그 화려한 막이 이제 열린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