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의 언어 인도네시아어
인도네시아에 3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인도네시아어(이하 인니어)에 서툴다. 생존에 필요한 짧은 말 정도 할 수 있는 정도. 자카르타에서 같이 일하는 현지 NGO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영어로 말을 해도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다. 그렇게 나는 자꾸 영어를 쓰다 보니 인니어를 쓸 필요성도 크게 못 느꼈고, 실제로 실력도 그다지 늘지 않았다. 따로 공부한답시고 인니어 단어를 중고등학교 때 영어 단어 외우듯이 1,000개쯤 외웠는데, 그 마저도 잘 쓰지 않아 대부분 잊어버렸다.
우리 프로젝트에서 같이 활동하셨던 분 중에 컴퓨터 선생님이 있다. 그분은 영어를 잘 못 하셔서 인니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덕분에 인니어 실력이 매우 빨리 늘었다. 컴퓨터 선생님은 인니어를 굉장히 잘하신다. 나와는 이미 실력 차이가 꽤 크다.
영어 실력이 오히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걸림돌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한 상황, 바로 내 이야기다.
인도네시아어(이하 인니어)는 원래 인도네시아에서 공용으로 사용되던 언어가 아니다. 인니어의 본류는 말레이어라고 하는 말레이 반도와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한 해상 교역의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교역어였다. 풍부한 감수성을 담고 있는 우리 한국 말과는 달리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쉽게 하기 위해 언어 체계가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다. 단순함의 정도는 맛과 감각 그리고 색깔 등을 표현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쉽게 비교가 될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수천 가지 방법으로 표현 가능한 감각들이 인니어에서는 몇 가지 단순한 언어로 정리된다. 간단한 단어의 미묘한 느낌 차이를 현지 친구에게 물어봐도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단한 뉘앙스 차이는 현지인들끼리도 그냥 문맥으로 알아듣는단다.
인도네시아는 무려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네덜란드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인도네시아도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가 되었는데, 당시 신생 정부가 국가 공용어로 채택한 것이 말레이어다. 인도네시아 독립 당시 여러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들의 연합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다수 부족 대표들은 미국과 비슷한 연방제 국가로 형태를 잡자고 했다. 그런데 초대 대통령인 소카르노가 강력한 중앙 집권제 국가로 틀을 잡지 않으면 국가의 힘이 분산되고, 또다시 외세의 침략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논리로 연방제를 반대했다. 각 부족 대표들은 연방제의 자율성이 더 매력적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에 또 다시 식민지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연방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는 대통령 중앙 집권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인종과 각기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언어가 부산스럽게 섞여 있는 인도네시아의 공식 언어로 말레이어가 채택되었다.
그렇다고 인니어가 인도네시아 모든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비행기로 약 7시간이 걸리는데, 이는 한국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만큼이나 먼 거리다. 16,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지리적으로도 넓고 그만큼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는 만큼 각 민족의 언어와 지방 방언이 무수히 많다. 당장 생각나는 대표적인 종적의 언어만 해도 자바어, 순다어, 바탁어, 아체어, 발리어(그 발리 맞다), 빠당어, 마라도어, 파푸아어 등이 있다. 주요 섬마다 종족과 언어가 다르고, 심지어는 좁은 섬 안에서도 서로 다른 종족이 다른 언어를 쓰기도 한다.
이들 소수 민족들도 학교 교육과 TV 등 미디어를 통해 표준어인 '인도네시아어'를 접해 이제는 제법 잘 알고 있지만, 지역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는 여전히 자기 종족의 토속 언어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렇게 분열된 민족과 언어, 종교 때문에 종종 골머리를 섞는다. 이들이 분리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영호남 사이에 지역감정은 있어도 우리는 두 나라로 쪼개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사정이 훨씬 복잡하다. 티모르 해의 작은 섬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그 조그만한 섬을 절반으로 쪼개 동티모르가 독립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서북쪽 끝에 있는 아체 지역은 한 때 무장 독립투쟁까지 할 정도로 중앙정부와 강경하게 대치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쪽 파푸아섬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인도네시아 중앙 정부와 심하게 대치하고 있다. 파푸아는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4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멀리 동떨어진 섬이다.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문제로 커다란 섬 파푸아가 독립을 주장하며 소요 사태가 더 커질까봐 인도네시아 중앙 정부는 이번 파푸아의 시위를 상당히 위협적인 사건으로 보고 상당히 엄중하게 대처하고 있다.
말레이어는 정규 학교와 미디어 등을 통해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역사의 흐름과 함께 말레이어에 인도네시아적 특성이 가미되어 현재의 인도네시아어가 되었다. 인니어는 말레이시아어와 90% 이상이 같아서 서로 간에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다. 말레이어 계통의 언어는 현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동티모르 일부와 태국 남부 등 동남아시아와 폴리네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그 사용자는 약 2억 2천만이 넘는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베스트셀러 총. 균. 쇠를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인니어를 공부하면, 말레이어를 익히는 셈이니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언어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쓰는 글로벌 언어인 셈이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중앙 정부는 정책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들을 결속시키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Kita Indonesia'(우리 인도네시아)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애정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인도네시아와 비교하자면 한국은 역사, 문화, 언어 등을 국민 모두가 공유한다는 점에서 국민 정서를 공유하기에 좋은 나라가 아닌가 싶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종족들이 공용 언어로 받아들여 함께 쓰는 인도네시아어는 정말 흥미로운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