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Nov 06. 2019

남자는 여자보다 여성을 선호한다

여자는 남성보다 남자를 선호한다

남성(男性)과 여성(女性) 그리고 남자(男子)와 여자(女子)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의 모든 동물은 수컷과 암컷으로 구분된다. 인간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컷은 남성으로 암컷은 여성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인간 세계는 동물세계에 없는 남자 그리고 여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성별이 매겨진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별에 따라 주민등록번호의 뒷자리 첫 번째 번호가 1이냐 2이냐가 결정되고 가야 할 공중 화장실과 목욕탕이 결정된다. 문명이 있는 어떤 세계를 가든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는 사춘기(2차 성징)가 되면 확연해진다. 남성은 정소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분비가 많아지고, 여성의 난소에서는 에스트로겐을 분비가 많아지며 각자 다른 신체적 변화를 겪게 된다. 


 여성은 아기를 가질 몸을 만들기 위해 골반이 넓어지고 엉덩이가 커진다. 유방이 발달하고 월경을 시작한다. 피하지방이 발달되어 유선형의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어 낸다. 반면 남성은 변성기가 찾아오고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지고 수염과 구레나룻가 자란다. 호르몬 과분비로 얼굴엔 여드름이 생기고 배출되지 못한 팔팔한 정자들이 주인의 허락 없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경험(몽정)을 하게 된다. 이 모든 변화는 나의 의지와 환경에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남녀는 종족 번식을 위한 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편입되지 않은 순수한 사춘기의 남녀는 그런 성징이 뚜렷한 이성에게 끌리게 된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넓은 골반과 엉덩이를 가진 S라인의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는 것은 그 여성이 출산을 위한 최적을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유전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종족번식의 본능을 사랑이라는 휴머니즘적인 감정으로 승화시켜 구성(性)이 아닌 구애(求愛)로 포장한다. 


 여성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탄탄한 근육으로 덮혀진 강인한 남성 그리고 중저음의 베이스 기타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귀를 간지럽혀 줄 남성을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새끼와 자신을 적(다른 수컷)들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밤마다 달콤한 속사귐과 터프한 완력으로 자신을 황홀하게 만들어 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 매력에 끌리는 건 인류가 시작되고 수만 년이 지났어도 바뀌지 않는 본능이다. 아직도 수많은 TV광고 SNS에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자신을 알리기 바쁘다. 눈과 귀가 멀지 않은 이상 이 성적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초의 인류는 의식주의 해결에 쏟아붓는 시간이 인생의 전부였다. 일하고(사냥하고) 먹고 자고 싸고 낳고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인류가 수렵에서 농경생활로 정착을 하면서 잉여물이 생기고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선천적인 역할만이 아닌 문명과 문화에 근거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지역과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변해간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지기까지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남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남자는 성적인 남성의 역할보다 사회적 남자의 역할이 더욱 부각된다. 큰 키와 넓은 어깨 강인한 근력보다 조직과 사회의 직급과 지위가 더 큰 힘을 쥐어주고 싱싱한 정자보다 콘크리트 건물과 화려한 고급 세단이 더 많은 여성을 유혹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남자로서 여성들의 우대를 받는다. 물론 그런 남자가 남성성까지 갖추었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면 호날두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하지만 후자보단 전자가 우선이다. 현대사회의 생존은 남성성 보단 사회적 남자의 위치가 더 중요하다. 

크리스티아노 호날두

   시대가 발전하고 여성의 교육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여권도 신장해 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자의 기준이 변해가고 있다. 성평등을 외치며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되던 분야와 세계에 까지 여성들의 영역을 펼쳐나간다. 그런 신여성의 삶이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롤 모델이 되어간다.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남성들의 성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자로 변모한다. 아기를 가지고 종족의 번식을 위해 남성을 유혹하는 성적 매력보다, 더 많은 지식과 사회적 인정을 통한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것이 자신을 가치 있는 여자로 만든다고 믿는다. 


남성은 여전히 여자보단 여성을 선호한다.


  시대적 남녀의 가치관이 변해도 유전자 속에 박혀있는 자웅(雌雄:암컷과 수컷)의 본성은 사라질 수 없다. 사회적 성별의 역할이 원초적 성별의 역할 위에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남성의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성은 사회적으로 우월한 여자를 여성으로 받아들이기 힘겨워 보인다. 수만 년간 여성을 지배해온 유전자가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바뀌는 게 쉽지 않다. 그런 여자와 같이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고 싶을지언정 한 여성으로서 종족번식의 동반자로 생각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여성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자가 되는 순간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남자를 찾게 된다. 암컷의 유전자에는 자신보다 우월한 수컷을 찾는 본성이 새겨져 있다. 물론 우월한 수컷의 기준은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 사냥을 잘하고 힘으로 다른 수컷들을 제압하고 적을 제거하는 우월함은 이제 야만적인 남성으로 치부되고 사회 시스템과 돈의 이치를 잘 아는 남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런 남성은 여자들의 영역 확대와 저성장의 시대적 변화로 인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갈수록 찾기 힘들어진다. 여성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진 남성은 남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성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남성을 찾을 수는 있어도 남자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사회적 동물이 되는 순간 보이지 않는 계급은 계층을 만들고 비슷한 계층끼리 어울리게 마련이다. 가끔 다른 계층(사회적으로 열등한)과의 관계를 가지지만 비공식적이며 프라이빗한 영역으로 감춰진다. 이것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던 계급사회가 뒤섞여버리면서 생긴 현상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성 역할 변화의 물결인가?


  요즘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한 사회 이슈가 책과 영화[82년생 김지영]로도 만들어져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틀린 말은 없다. 어느 쪽이 나를 대변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성은 바꿔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맹점이 있다. 남자가 여자로서 살아볼 수도 여자가 남자로서 살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쟁은 끝이 날 수 없다. (트렌스젠더들은 좀 이해하려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지금은 그것이 변하려고 진통을 겪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보인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평등이라는 단어는 나와 상대방이 둘 다 인정했을때 성립된다는 것이다. 


부계 사회와 모계 사회의 공존?!


  같이 할 수 없는 남성과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가부장적(家父長)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남자가 여자와 자녀를 보호하고 부양해야 한다는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과거 남성의 전투력은 이제 국가의 법과 치안으로 대체되어 여자와 자녀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닌가? 여자가 남자와 자녀를 부양한다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여성이 원했던 평등한 사회는 왜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의 공존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몇 만년을 이어온 수컷의 버릴 수 없는 자존심과 아직까지 이루지 못했다는 여자들의 평등 추구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선호하지 않게 된다.


 그 팽팽한 줄다리기의 끝은 어디일까?

작가의 이전글 필리핀 예배당에서 내가 깨달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