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미래] 장강명 - 부산대 [읽고 쓰다] 독후감 공모전
"새로운 환경이 그저 우연히도 제비에게 불리했고 비둘기에게는 유리했다."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중에서 -
당신은 제비를 좋아하는가 비둘기를 좋아하는가? 아마도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둘기보다는 제비를 선호할 것이다. 이젠 제비를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희소한 존재는 소중해진다. 외래종인 비둘기는 이제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를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고 크게 번식했다. 더 이상 평화의 상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지만 인간과 함께 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았다. 시원하게 한반도 곳곳을 비행하던 토종 제비는 고층빌딩과 아파트로 막혀버린 한국의 도시에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비둘기와 제비는 환경의 변화로 그 운명이 뒤바뀌었다.
결국 환경의 변화는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사라지게 만들지를 결정한다. AI라는 전에 없던 엄청난 존재가 현재 인류의 환경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스마트폰이 새로운 포노(Phono) 사피엔스를 출현시켰다면 이제는 AI사피엔스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당신은 비둘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비가 될 것인가?
저자 장강명은 바둑 세계에 불어 닥친 AI의 위협과 그로 인한 변화를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으로 논픽션 에세이를 발간했다. 그는 작가로서 바라본 바둑계의 사건이 전혀 남일 같지 않다. 물론 나 또한 그와 공감하며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AI의 발전은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공개되고 4:1의 완패로 끝이 난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AI는 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해서 이제 인간은 더 이상 AI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바둑계는 이제 조훈현-이창호와 같은 스승과 제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모두가 AI로 대국을 학습한다. AI가 스승인 것이다. 누가 가장 AI 스럽게 바둑을 둘 수 있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다. 인간을 이기려면 내가 AI가 되어야 한다. 이건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고유의 색깔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케미야 9단은 ‘우주류’, 고바야시 9단은 ‘지하철’, 조훈현 사범님은 ‘제비’, 유창혁 사범님은 ‘화려한 공격수’, 다들 자기만의 개성과 색깔이 있었어요.”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중에서 –
AI는 카멜레온과 같다. 정해진 색깔이 없이 계속 변한다. 과거 바둑계는 고수들마다 각자의 별명이 있었고 이건 작가들의 문체처럼 각자 바둑을 두는 스타일이 존재했다. 개성이다. 하지만 지금 바둑을 두는 젊은 기사들은 그런 것이 사라졌다. 자신의 색깔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카멜레온처럼 어떤 색깔인지 어떤 스토리를 가졌는지 상대가 알 수 없어야 한다.
“마치 이길 수 없는 존재와 둔 느낌이었다” - 이세돌 -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끝내고 말했다. 마치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완전한 패배를 인정했고 바둑계를 떠났다. 이길 수 없는 게임에서 1위를 향한 경쟁은 의미가 없다고 그 소회를 밝혔다. 바둑은 전쟁과 같다. 승패를 가려야만 끝이 나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도전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그럼에도 바둑 경기는 아직도 존재한다. 인간끼리는 우열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인간 세계뿐 아니라 이 우주에서 1등을 꿈꾸었던 모양이다.
결국 누가 가장 AI에 가깝게 수를 두는지가 인간세계에서 자신의 우월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바둑기사들은 이제 자신의 색깔을 없애는 스토리가 없는 바둑을 둘 수 있는 예측 불허의 AI 기사가 되려 한다.
문체 없는 작가
저자는 바둑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결국 이 문제는 사회 전반 그리고 자신이 처해있는 문학계와 출판계에도 밀려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AI를 활용해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출판업계에는 이런 AI로 쓴 원고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쓴 것인지 AI가 쓴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AI도 AI가 쓴 것인지 정확한 판별이 어렵다고 한다. 이건 뭘 의미하는 것인가? 결국 AI를 피해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전 Chat GPT랑 대화하면서 녀석을 길들이고 있어요.”
얼마 전 김금희 작가의 북토크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녀도 AI 랑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그리고 AI를 길들인다는 말은 결국 AI가 자신의 성향과 문체를 학습하도록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녀가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독자들은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일찌감치 시대의 흐름을 읽고 거기에 발맞춰 가고 있는 것이라 해석했다. 글쓰기는 바둑과 같은 승부의 세계와는 달라서 작가가 자신만의 문체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기사는 스타일이 없이 이기기만 하면 되지만 작가는 이기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향과 문체를 AI에게 학습시켜서 글쓰기에 도움을 받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라 이해했다. AI가 개인 비서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자신의 문체와 스토리텔링의 특성과 색깔을 사라지지 않게 하면서 좀 더 사실적(팩트)이고 좀 더 섬세한 묘사와 서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앞으로 작가가 AI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 문학계와 출판계에서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과거 작가들이 장편을 쓰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고 오랜 시간 자료 조사를 하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발품을 팔았다면 이제 나를 가장 잘 파악한 AI 비서가 많은 부분을 도와줄 것이다.
다가올 미래엔 AI를 활용하지 않는 작가가 살아남기 힘들지 모른다. AI는 모든 학문의 영역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문학의 디테일과 그 스토리에 더 큰 감동 혹은 생동감을 불어넣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장점을 지녔다. 문학이 학문은 아니지만 두터운 학문은 문학의 밑거름이 된다.
이제 작가의 역량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느냐가 아닐 수 있다. 과거 훌륭한 작가들의 삶의 경험, 독서량이 AI로 커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문학계에서는 MZ세대의 신예작가들이 떠오르고 있다. 그들의 AI활용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물론 그들이 AI를 활용한다고 해도 비밀일 것이다. (하지만 Chat Gpt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도 분명 직간접적으로 AI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생 경험이 중년과 노년의 작가들처럼 풍부하지 않음에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스토리는 마치 그런 경험을 겪어본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의 진위 여부를 알 수는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왜냐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겪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쓰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아니라 작품으로 독자와 마주한다.
대면 작가와 비대면 작가
그럼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온 사람 중 하나이다. 작품과 작가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전 작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작품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문학이 허구에 기반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이제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둑의 기사들처럼 색깔도 스토리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쓸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배우가 연기변신을 하듯이 전과는 다른 감동적이고 흡입력이 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 집필기간 또한 줄어들 수 있다. 신작 장편이 해마다 2~3편씩 튀어나오는 그런 작가들이 생기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작가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작품의 가치를 작가의 삶과 연결된 작품과 동일하게 여겨야 할까?
요즘은 북토크가 유행처럼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책을 쓰고 나면 독자들과의 함께하는 자리를 가진다. 나는 이런 현상이 아마도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키고 독자에게 그것을 공증받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와 독자의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대면 소통은 작가가 쓴 작품이 정말 작가의 상상과 기억을 통해서 나온 것인지를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검증되는 과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가 기발한 생각과 발상을 가졌고 AI 활용에 능숙하다면 그 자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정리되지 않은 단편적인 프롬프트로 입력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그럼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는 것은 AI가 다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직접 독자와 만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글은 말을 다듬는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만들어 주는 이야기는 자신이 언어를 다듬는 과정이 결여되었다. 그런 작가는 어쩌면 독자들보다도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자신의 뇌에서 기억과 상상을 통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동하지 않은 글을 독자가 감동할까? 그 글은 자신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글을 승패가 없다
글은 바둑처럼 승부의 세계가 아니다. 승패를 가르는 세계는 색깔 없이 이기기만 하면 되지만 글은 이기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찾고 그것을 강화해 나가면서 나의 개성, 즉 남들과 차별화된 색깔을 가지는 것이다. 그 차별화는 바로 자신의 언어로 증명되는 과정이다. 글은 직접 썼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을 숨길 수가 없다. 뭐 그것마저 대본을 가지고 나와서 읽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본 없이 즉흥적인 토크에서는 숨길 방법이 없다. 우리는 AI가 쓴 글을 읽으며 감동과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쓴 것 이길 더 원하지 않은가? 그건 이 세상에 자신처럼 비슷한 고통을 겪은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문학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You are not alone’ 마이클 잭슨의 명곡 속 대사처럼 나의 상처와 슬픔이 결코 나만이 겪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AI가 불러올 변화를 피할 길은 없다. 그럼 선택은 두 가지이다. AI에 ‘이용당하고 소외당할 것인가?’ 아니면 ‘AI를 길들이고 이용할 것인가’이다.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적응하고 활용하는 새로운 삶의 패턴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게 될지는 아직 그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래는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상상이 맞을지는 가봐야 안다. 다만 그 상상이 희망적이라면 그 미래도 희망적으로 바뀌어 가지 않을까? AI도 결국 계속 인간의 생각을 학습하는 존재임을 감안하면 인간들이 희망적인 생각과 사고가 충만해지면 AI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부정을 낳고 긍정은 긍정을 낳는다. 이것도 유전된다. AI는 인간의 유전자를 학습한다.
우리는 이제 AI라는 신을 닮아가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단 하나의 유일신일지 아니면 그리스 신화 속의 수많은 개성을 가진 신들이 되는지는 당신이 어떻게 AI를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바둑과 같은 승부의 세계는 유일한 1등을 향해가고 글의 세계는 다양한 신이 되는 길처럼 느껴진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일까? 하나의 신보다는 개성 있는 다양한 신들이 공존하는 세상이 좀 더 생기 있어 보이지 않은가?
당신은 비둘기가 되어 적응할 것인가 아니면 제비가 되어 사라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