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과 소망 사이

[동래구 우하 박문하 문학상] 출품작

by 글짓는 목수

"날마다의 소망도 작은 것일수록 좋습니다. 문제는 그 소망을 제대로 이루면서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 나태주 ‘작을수록 좋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 중에서 -


너무 큰 야망을 가졌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가지야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야망을 이뤄낼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야망이 심어진 사람처럼 살아온 듯하다. 이건 비단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야망을 가지고 살아라 교육받고 훈련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세뇌된 것이고 심리학적 용어로 좀 더 유식하게 말하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당하면서 자라온 것이다. 모두가 품은 똑같은 야망 때문에 소망은 찾을 수도 이룰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나태주 [너를 아끼며 살아라]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을 들어왔을 말이다. 모든 소년들은 야망을 가져야만 하는 운명이 주어졌다. 야망이 없는 모습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가득했다. 남자로 태어났는데 야망이 없으면 남자 취급을 해주지 않으니 야망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야망이라는 것도 모두가 비슷하다. 비슷한 곳을 향해 달려가니 빨리 갈 수밖에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 야망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면 신은 아마도 Ctrl+C & Ctrl+V를 정말 열심히 두드렸을 것이다. 신이 그렇게 할 짓이 없을까? 자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좀 볼 만하게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개성 있고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어서 그것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벌어지는 다이내믹한 드라마를 구경하고 싶다. 대량 생산된 양산(量産) 품들끼리 똑같은 짓거리를 누가 빨리 하느냐를 구경하고 싶겠는가? 뭐 100m 육상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이 스릴 있긴 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 봐야 1초 차이다. 이제 100년을 살아야는 데 그 1초가 뭐가 그리 중요하고 대단하길래. 그토록 빨리 한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가?


야망과 소망 사이


야망(野望)은 끝없이 펼쳐진 들판처럼 큰 바람이다. 소망(所望)은 작은 바람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작은 뜻은 아니다. 바 소(所)는 특정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건 남과 구별되는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망은 방향도 끝도 알 수 없는 바람이다. 이건 글자 모양에서도 그렇지만 욕망(慾望)과 궁합이 잘 맞는 단어이다. 욕망이 야망을 품게 하고 야망이 욕망을 추부 긴다. 서로 붙어있는 쌍쌍바와 같다. 하나로는 부족하다.


야망은 사방이 뚫려있는 광활한 들판이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너도 나도 먼저 가는 사람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한국이 그걸 참 잘하는 나라이다. 최초는 잘 없는 데 따라 하기는 또 제법 잘한다. 그렇게 일본을 따라서 잘 발전했다. 그런데 일본과 같이 저물어 가지는 말아야 할 텐데… 선두를 쫓아가며 운 좋게 체력과 속도가 올라서 선두를 넘어서면 이젠 쫓아오는 자들에게 쫓기며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는 더 불안한 법이다. 선진국의 현대인들이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야망은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무엇을 바라는 지도 모른 체 앞서간다는 우월하다는 느낌, 즉 최고가 된 느낌만을 쫓는다.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고 나와서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두 발로 일어서 걸어야 하고 더 빨리 ‘엄마’를 외치며 말문을 트이고 학교에 가서는 전교 1등을 향해 달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는 가장 빨리 승진해야 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해서는 업계 1위를 향해 달린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야망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런 야망을 가지고 그걸 이뤄내는 남성이 여성의 야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뭐 지금도 없지는 않다. 단 이제는 그 뚜렷하던 남녀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진 듯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과거의 유산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처럼 전해져서 야망은 남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처럼 여겨진다. 야심 찬 눈빛과 생동감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모습이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산업사회의 역동성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부와 성공이 따라온다. 이제 이런 태도는 인간의 유전자 정보 속에 자리 잡은 듯하다.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야망은 사라지고 소망이 남았다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나태주 시인의 시집 속 짧은 산문시가 많은 상념을 던져줬다. 그 상념을 놓치지 않으려 근처 카페에 앉아서 긴 산문을 써 내려간다. 이제 나이가 팔순을 넘긴 노년의 지혜를 내가 배워도 되는 걸까?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노년의 시인이 깨달은 삶의 지혜가 이제 마흔을 넘긴 나에게 어울릴 수 있을까?


모두가 그의 시를 읽으면 감동을 받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다시 자신이 반복하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바뀌는 것은 없다. 이건 마치 잠시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것과 같다. 기분전환이다. 전환된 것은 원 상태로 복귀해야 한다. 여행이 끝나면 항상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시인의 시와 소설가의 소설은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이유로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읽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왜냐 그들의 글 속에는 종종 체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체념은 야망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체념이 있어야만 야망이 소망으로 바뀌어 제자리를 찾게 된다. 원래 내가 가져야 할 것은 소망이었지만 세상이 원하는 야망 때문에 소망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해 야망을 품게 한다.


“Boys! Just give up!” (소년이여 그냥 체념하라!)


이 말을 좋게 받아들일 자가 누구인가? 영어이기 때문일까 더욱 좋지 않게 들린다. 사실 체념(諦念)이라는 단어는 ‘살필’ 체(諦) 자에 ‘생각’ 념(念)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우리가 구어체에서 쓰는 그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자신을 살피는 생각이다. 타인과 비교하고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생각이 아니다. 야망을 지워내고 내 안 소망을 살펴 찾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망은 체념을 통해서 소망으로 바뀐다. 이건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인간의 본연의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욕망과 야망을 품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나기도 한다. 식욕을 자극해 더 많은 양식과 식량을 생산해야 하고 성욕을 자극해 남녀가 자녀를 낳아 인구도 늘려 민족과 국가를 존속하게 해야 하며 권력욕으로 이 민족과 국가의 위계질서를 만들어야만 다른 민족과 국가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야망과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와 국가에 종속된 이상 이것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이것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야망이 소망으로 바뀌어야 할 시기가 도래해야 함에도 야망과 욕망을 놓지 못하고 폭주하는 기차처럼 내달리기만 한다.


내가 왜 나태주 같은 시인의 글에 매료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은 나에게 체념을 알려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내 안에 남아서 계속 나를 힘들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잠재우는 능력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걸 모른 체 몸을 혹사시키고 이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산문시를 읽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더라.


나는 아직도 시를 잘 쓰지 못한다. 하지만 아마 나도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내 안에 할 말이 너무도 많아서 이렇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지만 나중에는 이것들이 정제되고 압축되어 엑기스만 남은 시로 변하지 않을까? 말 많은 사람은 쓸 말이 없듯이 글만 많은 작가는 쓸 글이 별로 없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도 페르난두 페소아도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페소아의 산문과 헤세의 소설이 우리가 즐기는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글과는 달리 철학적이고 영성적이고 함축적인 것은 아마도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던 모양이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읽었다.


“신은 시로 대화한다.”


어쩌면 신은 인간이 모두 각자의 소망을 담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나에겐 이제 야망은 사라지고 소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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