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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가 사이

[영국, 500년의 문학과 예술] 정은귀 교수

by 글짓는 목수

"소설가는 세계를 만들고 시인은 세계를 해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시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육하원칙도 필요 없고 인물과 사건과 배경도 필요 없다.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울타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이 시를 이해하기 힘든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정해진 질서와 울타리가 있는 환경과 그 속에서 올바른 문법과 모순 없는 논리에 익숙해진 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해해 나가야 할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마치 속세를 떠나 있는 존재와 같이 비친다. 소설가는 속세를 떠날 수 없다. 세계를 만들기 위한 소재는 세계 속에서 얻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계가 필요 없기 때문에 세계 속에 속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시를 쓰는데 그런 것들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진정한 문인은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스스로 해체하는 존재가 아닐까...


부산 박물관


"시인이 아니면 되고 싶은 것이 없다."

- 헤르만 헤세 -


헤르만 헤세는 시인이 아니면 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강연자도 그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강연자도 대학교 교수이면서 한 명의 시인이었다.


"교수님은 소설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1시간 반 가량의 영국 문학 속 사랑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강연자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질문하길 즐긴다.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손 한 번 들지 않던 학생은 불혹이 넘어서 질문이 폭발했다. 진정한 배움이 중년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제25기 부산박물관 대학: 정은귀 시인 - 사랑을 묻다, 마음을 바꾸는 언어, 세상을 바꾸는 시] 251107

"와, 선생님! 너무 좋은 질문을 주셨어요."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래 맞다. 질문은 답변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아니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스승과 제자라는 이분법적 관념에 사로잡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교차함을 알지 못했다. 문답 방식의 교육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제자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스승에게 던짐으로 그것에 답을 하며 배움을 얻게 된다. 모든 고대의 성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지혜를 전수했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질문에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는 듯이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가와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가는 일단 똑똑해야 한다. 그녀의 생각이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머리가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똑똑함이란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사고가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육하원칙과 인물 간의 관계와 사건 사고의 인과관계와 시간과 공간의 변화 이 모든 것을 총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그 속에서 세계관을 담아내는 일, 이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 그친다면 철학서나 비문학 에세이 정도에서 끝나겠지만 소설은 문학이기에 감성이 필수적으로 가미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빠져든다는 것은 마치 우물과 같아서 반드시 그 울타리와 시공간을 설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집을 짓는 것처럼 주춧돌을 놓고 기초를 만들고 뼈대(프레임)를 올리고 벽을 세우고 미장을 하고 페인트를 하며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작가(作家)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집은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작가와는 구별될 수 있다.

시인은 현명해야 한다. 시인은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기서 현명함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즉 현대인이 생각하는 지식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의 현명함은 이 복잡한 세상 속에 눈을 현혹하는 수많은 것들에 신경을 끄고 자연과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보려 하는 지혜에 가깝다. 세상의 프레임과 벽이 올라간 울타리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길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이 말은 사물을 1000만 화소의 카메라로 찍은 화질 좋은 사진처럼 바라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채로운 색의 화려함과 선명함은 오히려 현혹에 가깝다.


시인은 단순하지만 오묘하게 간결하지만 신비하게 표현한다. 일반 사람들이 눈치채기 어렵게 표현한다. 소설가는 사건과 인물로 눈에 보이게 질서 정연하게 인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시는 그런 현명함을 어느 정도 갖춘 자들이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소설은 누구나 글을 계속 따라오기만 한다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물론 걔 중에는 소설을 따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언어 감수성과 문해력은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인 것이다.

부산 박물관 - [영국, 500년의 문학과 예술]

세계를 만들고 허물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 그 누구도 세계를 해체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나만의 집을 갖고(만들고), 나만의 사상과 철학을 만들고, 나만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 자신만의 공간과 생각과 소유를 가지고 싶을 것이다. 공간은 사람이 모이고 생각은 사람을 하나 되게 하고 소유는 사람을 배불리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어 간다. 각자 자신만의 세계들이 어우러져 더 크고 다양한 세계가 만들어지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간혹 이런 세계를 벗어나려는 사람(수도자 혹은 시인≒헤세)들, 혹은 이런 세계를 거부(철학자≒니체)하고 해체(사상가≒마르크스)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문학의 세계 또한 이와 비슷하다. 문학에도 너무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이 다양한 장르는 다양한 세계와 그 맥락이 다르지 않다. 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장르는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산문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다. 어떤 세계관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설득력과 감동을 주는지가 그 세계관의 크기를 결정한다.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는 독자를 통해 확장된다. 문학은 작가에서 시작하지만 독자를 통해 그 세계의 지평을 넓혀간다. 비현실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시는 그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시는 구체적인 사고방식을 묘사하고 행동 양식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그저 고삐 풀린 소들처럼 울타리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그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 울타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시인은 (독자에) 구속되지 않고 구속하지도 않는 존재이다. 그래서 현실에 사람들이 바라보면 한량이다.

[제25기 부산박물관 대학: 정은귀 시인 - 사랑을 묻다, 마음을 바꾸는 언어, 세상을 바꾸는 시] 251107

시인의 세 종류

나에게 시인이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비친다.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과 시인으로 변한 사람이다. 나는 이 둘을 구분한다. 이건 나의 주관적인 감각에 의한 판단이지만 그 판단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우선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시인이다. 이런 시인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똑똑하지 못해 못쓰는 것이 아니라 현명해서 쓰지 않는 자라고 본다. 문학을 통한 현상 변경을 원치 않는 자이다. 정확히는 그럴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외부에 의해 내면의 현상변경을 원치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것이 외부의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의 표현을 비롯해서 세상의 드러난 모든 존재는 상호 영향을 받게 된다. 페소아는 그 둘을 분리해서 살았다.

Fernando Pessoa (1888~1935) & Hermann Hesse (1877~1962)

반면 시인으로 변한 사람은 헤르만 헤세와 같은 시인이다. 소설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명성을 얻었다. 그 세계는 놀랍고 방대했으며 그 세계가 기존의 현실 세계와 충돌하며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문학을 통해 현상 변경을 간절히 원했던 자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처럼 행동하진 않았다. 그는 표현하는 것에 그쳤을 뿐 행동하는 것은 작가의 역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초야에 묻혀 시를 쓰며 그가 지향했던 시인의 삶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떠났다.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또 하나의 시인이 있는데 이건 유래를 찾기 드문 형태의 시인이다. 나는 그 시인의 대표적인 예가 니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소설의 형태를 가진 서사시[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그는 철학자이면서 시인이고 또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니체처럼 문학과 예술 세계에 그토록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의 글은 철학과 문학의 그 어디쯤 애매한 위치에 존재한다. 그는 현실을 떠나 방랑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끊임없는 비판 했다. 당대에는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현상 변경을 원한 것 같지만 아무런 현상 변경도 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철학과 문학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의 생각에 현상 변경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페소아도 헤세도 니체도 다 마음에 든다. 그래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뭘 써야 할지….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문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글은 '시'라는 것이다. 한 강연자와의 문답이 시인의 존재를 설명하는 명확한 명제를 하나 떠올리게 했다. 감사하다.


"아무런 의견도 갖지 않음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의견을 전부 가진다는 것은 시인임을 의미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12장 -


시인이 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무(無)이다.


강연 후 카페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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