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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사이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_하이데거] 박찬국 - 두 번째 -

by 글짓는 목수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연옥불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존재자가 드러내는 유일무이의 충만한 존재에 감응하는 열린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_하이데거] 136p -


불안이라는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안은 회피하면 할수록 더 커져간다. 이건 공포처럼 그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장면을 통해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포는 그 대상과 장면에서 벗어나면 된다. 하지만 불안은 보이지 않게 서서히 주변을 감싸도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안개가 짙어질수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불안은 깊어진다. 안갯속에 무언가가 나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 불안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불안이 삶의 종착지이기 때문이고 그 종착지가 언제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아이고 아직 마흔이면 청춘이지 살 날이 많은 젊은이가 우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믄 우야노?"

"죄송합니다. 제가 어르신들 앞에서... 그런데 뭐 오는 날은 정해져 있지만 가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허긴 그러네..."


얼마 전 자주 가던 카페 주인과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도심 속 산복 마을에 위치한 카페였는데... 독서모임 리더 양성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그곳을 한동안 찾았다. 그곳 카페의 사장과 친해졌다. 노년의 여성분이었는데 친해져서 갈 때마다 음료를 주문하며 스몰토크를 나누었다. 내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듣고선 한 마디 하셨다. 노년과 중년의 오래전 대화가 왜 책을 읽다가 떠올랐을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다.

우리는 책 속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식이 지혜가 되는 과정은 기억과 융합될 때라고 생각한다. 책 속에서 인상적인 구절들과 대화문을 통해서 과거 잊혔던 기억들이 상기되며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불러온다. 이것이 내가 책을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이다. 영감은 글감이 되어 이렇게 한 편의 글이 된다. 나는 이것이 지식이 지혜가 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식이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인간은 성장한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의 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성장이 반드시 (세속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년이 바라보는 중년은 청년이다. 노년은 중년을 부러워하고 중년은 청년을 부러워한다. 그 부러움의 전제는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것에 있다. 그건 삶을 변화시키고 성장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카페 주인에게 한 말은 그것이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일깨우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그들이 몰랐기 때문에 수긍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무시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그렇게 산다.


탄생도 죽음도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물론 죽음은 의도할 순 있다. 자살이다. 이건 인간만이 가진 가장 특수한 경우이다. 인간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우리는 자살을 죄악으로 생각한다. 이건 사회적, 국가적인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다. 자살은 공동체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살이 인간의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극단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살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믿는 자는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삶을 내가 스스로 끝낸다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행위와도 같다. 신을 자연의 섭리라고 본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자살이 된다.

천국과 지옥 사이


저자(박찬국)는 기독교(가톨릭)인 듯하다. 책을 읽다 그가 오랜 시간 불안의 늪에서 살아온 것이 느껴졌다. 연옥을 불안과 연결시킨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건 같은 기독교지만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개신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 연옥은 생(生)과 사(死) 사이의 고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갱생과 정화의 시간이 불안의 시간과 동일하다는 발상은 아주 흥미롭다. 개신교는 예수를 나의 주로 선포하고 세례(침례, 물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을 다시 태어난다고 본다. 물로 씻어내며 회개하고 모두의 앞에서 변화를 선포한다. 하지만 가톨릭의 연옥의 개념은 살아있는 시간 전체가 정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불안이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불안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느낌이다. 이 불안은 지옥처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스럽지 않지만 찝찝하고 어둡고 안절부절못한 상태를 가져다준다. 현대인이 육체적 통증과 정신적 압박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불안에 빠져드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심하면 우울증이 된다. 이 우울증은 자살과 연결된다.

Martin Heidegger (1889~1976)

"죽음은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것이기에 죽음이 자신을 고지해 오는 기분인 불안은 삶의 근저에 항상 잠복해 있습니다. 그렇게 숨어 있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엄습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_하이데거] 132p -


불안을 신이 인간에게 죽음을 직시하며 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보통의 인간들은 이런 기분에서 벗어나려 쾌락이나 중독을 찾는다. 쾌락(빠른 즐거움)은 불안과 공포 모두를 잊게 해 준다. 이건 일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고통 속에 보내고 밤이 찾아들면 쾌락을 좇으며 불안을 외면한다. 하지만 이 불안은 외면하면 할수록 커진다고 했다.


자살 공화국의 오명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자살 대표 주자들의 대부분이 중년의 남성이다.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위와 같다. 고통과 쾌락 사이를 오고 가는 삶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이것 중에 하나가 무너지면 그동안 커져버린 불안이 찾아든다.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은 우울이 된다. 불안을 죽이기 위해 자신도 죽는다. 고통의 대가로 돈을 벌고 돈은 쾌락을 살 수 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오랜 시간 길들여진 인간은 불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일자리를 잃고 부와 지위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과 쾌락을 오고 갈 수 없게 된다.

Fernando Pessoa (1888~1935)

“나는 그토록 힘들던 불안 속에서 거의 안식을 느낀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43장 -


불안과 친해진 한 시인이 있다. 불안을 드려다 보기를 밥 먹듯이 한 자의 기록은 불안을 가만히 들여다 봄으로서 불안을 경이로 바꿔간다. 그의 글을 읽으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는 자신 안에 엄습하는 불안을 밖으로 토해내는 과정이 스스로가 정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 일상과 일터에서 받은 고통을 밤이 찾아들면 쾌락을 좇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불안과 마주한다. 그렇게 불안이 만든 글은 경이를 느끼게 한다. 하이데거는 불안과 경이가 인간의 근본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 둘은 같은 본질의 다른 형태이지만 우리는 오직 불안만을 느낀다. 변비와 설사는 그 원인(본질)은 같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보이는 것으로 비유하면 이해될까? 그럼 왜 불안은 경이가 되지 못하는가?


“사물들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자신들의 신비로운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신비스러운 성격은 보통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85p -


경이와 놀라움을 구분하는가?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뛰어난 성과에 대한 놀라움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경이로움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경이로움은 일상과 주변에서 항상 존재했지만 인지하지 못한 것을 보고 느낄 때 생겨나는 기분이다. 이건 뛰어난 관찰과 관조의 자세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빠름의 속도가 아닌 느림의 여유 속에서 발견된다.


속도가 빠르면 시야가 좁아진다. 이건 촉각이 곤두선 집중의 시간이고 느림 속에서는 주변의 작은 것과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이건 관조를 통한 몰입의 시간이다. 집중의 시간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유발한다. 현대인은 만성 스트레스와 피로감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이유이다.


경이는 환희를 준다. 내가 이런 경이를 발견하는 글을 쓰고 났을 때 느끼는 것이 일종의 환희와 같다. 이건 쓰면서 서서히 경이로움이 드러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환희가 샘솟는다. 이건 마치 운동을 할 때 몸이 달아오르고 몸에 활력이 돌면서 극한의 순간 오르가슴과 같은 환희를 느끼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온전히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 후자는 육체에 가해지는 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육체는 유한하다. 운동선수가 느끼는 환희의 수명은 짧다. 정신은 그 반대이다. 정신활동은 뇌신경세포를 더욱 활성화하고 더 정교하게 연결시키며 경이로운 것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환희는 계속된다. 다만 그것도 육체가 살아있는 시간만 허락된다. 유한한 생명의 한계이다. 그런 점에서 AI는 그 한계를 초월한다.


우리는 천국(유토피아)을 꿈꾸면서 살지만 언제나 현실은 지옥(디스토피아)을 향해 간다. 이것이 반대로 되려면 그 사이의 연옥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렸다. 연옥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고 우리는 이 불안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불안을 회피하지도 죽이지도 않으면서.


그럼 신은 당신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_하이데거] in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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