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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서사 사이

[영혼을 위한 시 쓰기] 나태주

by 글짓는 목수

"서사란 우리네 인생과 삶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서정은 그 경험 위에 생기는 감정을 말합니다."

- 나태주 [영혼을 위한 시 쓰기] 126p -


서사는 빠르고 서정은 느리다. 서사는 빨리 읽어 내려가면서 다음에 벌어질 일과 나타날 인물들을 만나야 한다. 앞뒤의 정황적 맥락과 시공간적 인과를 이해하면서 읽어내려간다. 서사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서사시와 산문시를 읽는다면 이성적으로 느끼는 것이고 소설을 읽는다면 이성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평론이나 교양서를 읽는다면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서사적인 구조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성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글이라는 것 자체가 이성적 산물이기에 글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은 이성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이성이 얼마나 많이 개입하느냐 적게 개입하느냐는 어떤 글을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성적 사고에서 가장 멀어지고 싶다면 시를 읽어야 한다.


서정시를 읽는다. 최소한의 이성으로 최대한 감성적으로 읽고 느끼는 과정이다. 마치 취해 있는 느낌이다. 이건 쓰는 자나 읽는 자 모두 그렇다. 무언가를 쓰지만 뭘 쓰는지도 잘 모르겠다. 느낌에 따라 붓가는데로 쓰는 듯한 과정이다. 느리다. 한 장면과 느낌에 멈춰서 그곳에 깊이 빠져드는 과정이다. 이것의 시작은 그 어떤 과거의 사건과 경험 속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시작하지만 그것을 서사적 구조로 갖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아닌 그때의 감정만 쏙 빼내어 언어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허구의 사건과 경험의 변형된 기억을 시공간의 틀에 집어넣는 것이 소설(서사) 쓰기라면 그 시공간의 틀을 벗어나서 쓰는 것이 시(서정) 쓰기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그 디테일은 다르지만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서정시는 독자의 머릿속에 무엇을 떠올리게 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구체적인 (직간접) 경험과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서사적 진술을 통해 공감이라는 느낌을 소비한다. 그 서사가 담고 있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과거 어느 시점의 잊혔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 독자는 작가와 공감대를 가지게 된다.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면 대중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면 그 소설은 고전이 된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이건 비교적 쉬운 공감이다. 왜냐 사건과 인물과 배경은 비록 자신의 그것과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네 인생이 그 형태와 모습만 다를 뿐 그것들이 품고 있는 비극적 느낌은 대동소이(大同小異) 하기 때문에 그 서사가 리얼하고 사실적이라면 우리는 감동한다.


서정적인 글은 구체적인 이미지와 상황을 떠올릴 수 없다. 시인은 오로지 그 감정에만 몰입해서 글을 써나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시공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시공간에서 느꼈던 감정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개울에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와도 같다. 그 징검다리의 간격이 촘촘하다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간격이 넓다면 내공이 없이는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 서정시가 서사시보다 자유로운 것은 시인이 길을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가 촘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징검다리의 간격이 넓다는 것은 왼쪽 혹은 오른쪽에 놓여 있는 돌 중에 무엇으로 건너갈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곧게 뻗어있는 다리는 그런 고민이 필요 없다. 서사시는 그냥 작가가 설명하는 잘 깔린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상상이 필요한 이유는 글은 아무리 리얼하고 디테일하다고 해도 사진이나 영상처럼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언급하지 않은 것들을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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