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2018년의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글은 퇴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일기였다.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이제 나를 위한 기록을 남기겠다고 모두가 출근하는 평일의 어느 날 아침에 집 근처 별다방에서 썼던 8년 전의 블로그 (비공개) 일기를 들여다보았다.
<여유롭지만 어색한 월요일 - 백수일기 1st> 2018.3.12
회사를 나온 지도 이제 12일째 되는 날이다.
아직도 여유롭지만은 어색한 평일 아침이다. 언제쯤 되면 익숙해질까?
다짐만 하던 일기를 드디어 쓴다. 집에서 또 안 쓸까 봐 삼산 스벅에서 쓰고 있다.
(중략...)
잠이 밀려온다.
이제 오늘은 이만큼으로 마무리
이제부터 일기 계속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
평일의 번잡한 울산 시내에 백화점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카페에서 일기를 썼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읽고 50m 수영장에서 지칠 때까지 수영을 했다. 내가 왜 그 때 왜 저 책에 손길이 갔을까? 아마 한국에는 오랜 시간 무례함을 견뎌본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책을 읽다가 허기에 백화점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옆 자리에 앉은 두 주부들의 수다를 엿들었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웠다. 그렇게 하루 종일 울산 시내를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간 흔적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흘렀다. 6년의 시간은 해외에서 보냈고 해외로 가기 전 1년과 돌아온 후 다시 1년이 흘렀다. 이 모든 시간은 나의 기록 속 곳곳에 남겨졌다. 어떤 기억은 일기가 되었고 어떤 기억은 산문이 되었고 어떤 기억은 상상과 뒤섞여 소설이 되었다. 사실만 열거하듯 쓰던 일기는 어느새 다양한 글이 되어 나를 대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글을 들여다보니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기록은 기억을 불러내고 그 기억은 감정을 품고 있다. 감정이 없는 글은 남겨질 이유가 없다. 8년 전 회사에서 썼던 보고서를 추억하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 의미 있고 추억되는 글은 언제나 그때의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40년을 살면서 매 순간 감정을 느끼며 살았지만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았기에 그 감정들을 다시 느낄 수가 없다. 나는 그 기억들을 소환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 능력은 8년간글을 쓰면서 체득한 능력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내가 원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소환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기억은 기록이 없기에 사실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다. 그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상이고 허구라는 이름으로 쓰인다. 무의식의 기억은 그때의 시공간을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감정은 언제나 현상과 사물과 인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강력한 중력이 그때의 시공간을 뒤틀어 놓았다.
"읽는 것은 타인의 손을 통해서 꿈꾸는 것이다. 건성으로 읽는 것은 우리를 이끄는 낯선 손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피상적인 교양이야 말로 훌륭하고 심오한 독서를 위한 최선의 전제 조건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29장 -
8년의 시간 동안 많은 책을 읽었다. 관계의 시간을 읽기의 시간으로 바꾸어 버렸다. 40년간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지쳤다. 관계가 늘어날수록 나는 사라진다. 관계가 줄어드니 내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관계 대신 책 속의 타인이 남긴 글은 읽었다. 관계는 많은 감정적 육체적 소모를 요구하지만 읽기는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이건 소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모적이지 않다. 처음에는 피상적 교양과 허영으로 시작되었다. 퇴사와 함께 찾아든 시간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압박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중독적인 것들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관리에는 언제나 열심이었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구 혹은 조직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다 8년의 독서가 알려준 것이었다. 문학과 철학과 과학의 다양한 생각들이 이젠 더 이상 나의 글을 일기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독후감을 시작으로 에세이와 소설과 평론(칼럼)등의 다양한 글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보이는 기록들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정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었다.
삶과 글의 공통점
그때부터 삶은 모든 것이 글감이 되기 시작한다. 관계와 일상과 타인의 책 속의 이야기들 모두는 나의 기억과 상상 그리고 그때 차올랐던 감정들이 뒤섞여 문장으로 보여진다. 쓰기 전에는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쓰면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다 쓰고 나서야 알게 된다. 글이 삶과 다르지 않다. 글도 써봐야 알듯이 삶도 살아봐야 안다. 글을 정해놓고 쓰지 못하는 것처럼 삶도 정해놓고 살아갈 수 없다. 신이 인간과 다른 점이라면 아마도 그것이지 않을까?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도록...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또한 그곳을 벗어날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미래는 누군가에겐 불안이고 또 누군가에겐 희망이 된다.
올 한 해는 유독 많이 읽고 많이 썼다. 그건 아마도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그 희망이 무엇인지는 나를 오랜 시간 읽어온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시작된 글쓰기였다. 읽고 쓰는 과정은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고 지나오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과거 글쓰기의 시작을 들여다보니 그때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때는 그 감정에 빠져서 썼을 것이다. 지금은 그 감정을 관조하며 읽을 수 있다. 이건 나를 타자화 시키는 것이다. 그때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감정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문제는 우리는 모두가 그 감정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감정을 감추고 이성적인척 합리적인 척하며 서로에게 손해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남겨지지(기록) 않아 볼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이 계속 반복된다. 삶이 도돌이표 음악처럼 계속 반복된다. 변화 없이.
수기의 시작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왜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는 방식으로 돌아갔을까? 적잖은 시간 온라인상에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내 글이지만 내 의도와 의지와는 상관없이 글이 지워질 수도 혹은 도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온라인의 공간은 나의 공간이 아니다. 플랫폼이라는 주인이 권한과 통제의 힘을 가진 곳이다. 모두가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알리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은 반대로 그것이 나를 가릴 수도 혹은 지울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기억과 감정은 일단 수기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노트와 책장 사이사이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 기록들이 언제 어떻게 온라인에 기록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시간이 결정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모든 기록은 시간이 지나야 그것이 나 스스로도 이해되고 또한 타인에게도 이해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손으로 쓰는 기록은 좀 더 강렬한 감정을 불러오는 듯하다. 속도는 느리지만 온라인의 너나 나나 모두 똑같은 글자체가 아닌 못생겼지만 나만의 글자체를 지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문체는 다를 수 없겠지만 글자체는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문체는 베낄 수 있지만 오프라인의 글자체는 베낄 수가 없다. 이제 AI가 문체도 베끼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내 것인지 모르게 될지도 모른다. AI와 더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샌가 나와 똑같은 문체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뭐 나중엔 AI로봇이 직접 펜을 들고 나의 글씨체까지 베껴서 쓸지도 모른다. 그럼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진짜로 모르는 세상이 올지도...
매일 이른 아침 나는 이제 노트북을 켜기 전에 손에 펜을 든다. 그리고 종이에 글을 남기고 읽는다. 이 글들은 잃어버리거나 잊힐 수는 있어도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고의로 불태우지 않는 이상은. 과거 많은 글들이 그렇게 불태워졌다. 기록은 남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것에 의의를 두고 쓴다면 글은 불안을 끊어낼 수 없을 것이다.
글은 스스로에게 보이면서 남게 되는 자신을 보기 위함을 아는 자는 그런 불안 없이 계속 쓸 수 있다. 그 자는 글이 남겨져 타인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자가 아닌 자신을 읽기 위해 쓰는 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읽는 자는 찾기 어렵다. 그건 모두가 자신을 분리해서 시간을 두고 볼 수 있는 기록된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26년 한 해도 어떤 내가 드러날지 기대가 된다. 그런 기대가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을 살게 하는 것이다.
내년도 나는 나의 꿈을 응원한다.
그리고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꿈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