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난 후...
"실직이 문제가 아니야, 실직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문제야!"
- 박찬욱 [어쩔 수가 없다] 중에서 -
누구나 실직한다. 그 시기만 다를 뿐이다. 실직은 일찍 할수록 좋다. 그건 실직에 대처하는 법을 일찍 습득하기 때문이다. 한 직장 혹은 한 집단에 너무 오랜 시간 머문 자는 그 집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고 실직을 극복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한 분야에 목숨을 건 제지맨들의 모습이 이 시대의 전문가에 대한 의구심을 던진다.
한 가지 기술의 장인, 한 분야의 석학, 한 직종의 전문가 그들은 자부심이 크다. 그 자부심을 목숨처럼 여기며 산다. 하지만 그 자부심을 지키려는 투쟁이 자신의 자존감을 없애버린다. AI의 지능을 갖춘 더 빠르고 효율적인 로봇은 자부심 없이도 최고의 전문가(Specialist)이다. 이제 스페셜한 인간보다 제너럴 한 인간(Generalist)이 더 필요해 보인다.
실직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다.
나가는 문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오랜만에 한적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감상했다. 감상평을 써놓고 잊고 있었다. 해가 지나 감상문을 다시 읽으며 퇴고를 한다. 지인들의 극찬에 모처럼 찾은 영화관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대중의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을까? 네티즌들의 평이 호불호가 갈린다. 그래서 망설이다 보게 된 영화였다.
작품성이 강해지면 대중성은 낮아진다. 이 밸런스를 어떻게 잘 유지할 수 있느냐가 영화산업의 최대 관심사다. 요즘은 대중들의 수준이 많이 올라와서 오락성만 보지 않는다. 작품성도 갖춘 영화를 찾게 된다. 나 또한 단순 오락과 킬링타임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보진 않는다. 영상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다. OTT를 통해 보는 것도 고르는 것이 신중해진다. 소중한 시간 한 편의 영화도 재미있고 여운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여러 가지 메시지를 한 영화에 담고자 한 것 같다. 내가 [어쩔 수가 없다]를 본 후 떠올린 몇 가진 의문은 아래와 같다.
1. 가장(家長)이란 무엇인가?
2. 예술은 결핍에서 오는가? (딸)
3. 소득과 소비는 비례하는가?
4. (한 분야) 전문가는 필요한가?
5. 부부관계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6. 지키기 위해선 뺏어야 하는가?
7.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8. 자녀는 부모의 거울인가?
9. 내(가족)가 살기 위해 너(타인)를 죽여야 하나? (왜 모든 것을 경쟁과 전쟁으로 바라보나?)
독서 모임을 자주 하다 보니 토론과 발제에 익숙해져서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어떤 현상을 접할 때마다 질문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다행히도 이젠 AI가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어서 바로바로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만약 타인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면 그건 아마도 감정이나 생각(의견)처럼 사람마다 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확인이 필요한 경우 혹은 같은 소설책을 읽고 소설 속 어떤 인물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한 상대의 생각을 묻는 그런 것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타인에게 물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그런 정해진 답이 있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던진다면 그건 상대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AI 원시인이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치밀하지 못한 둘 중 하나의 어눌함이 만든 행동일 것이다.
책임감에 관하여...
내가 가장 집중한 질문은 첫 번째이다.
가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도 가장(家長)이라는 말을 쓴다. 집의 어른이다. 남자로 태어나 가장이 된다는 사명이 사망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얼마 전 올린 자살 관련 토론 영상(여자가 자살 못하는 이유)이 조회수가 높다.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았다. '너무 과도한 책임감'이 문제라고.
여자들은 책임감이 강한 남성을 선호한다. 이 책임감이라는 것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성을 삶을 지배한다. 전통적 가부장제가 가장이 마치 가족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처럼만 인식되지만 그 이면의 현상을 보지 않았다. 가족이 가장을 지배한다. 가장이 가족을 지배하던 시대는 붕괴되고 저물어가고 있지만 가장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관념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지배적이다. 제도부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건 남성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주인공(유만수)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자존심이 존재의 이유이다. 문제는 이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쪽도 함께 무너져 버린다. 마치 시소의 양쪽 균형을 맞춰야 하듯 일(회사)과 가족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가장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극 중 주인공이 다른 취업 경쟁자들을 없애서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설정이 다소 지나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가장이 가진 너무도 강한 책임감이 타인의 가정을 파괴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인 만큼 소중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가족이 짐이 되는 것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의 한 쪽면에 길들여져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이 소외되고 억압되고 희생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가족만 아니면 돼!"
이 말을 자신이 할 수 있을 때는 웃을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고 하는 말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모든 상황이 지금처럼 유지될 거라는 생각은 그래서 위험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위험한 이유는 세상의 변화에 새로운 길을 보지 못하고 하나의 길이 전부라고 그 길이 좁아지면 그곳에 있는 자들을 없애고 살아남으려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 하나의 길도 얼마가지 않아 없어진다는 것을 모른다.
"이제 기본 소득제가 보편화될 거예요. 그것밖에 답이 없어요."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AI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될까라는 발제에 나온 답변이었다. 앞에서 말한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AI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대는 잉여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그들을 누가 부양하는가? 국가 밖에 없다. AI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국가의 GDP 올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모든 국가가 AI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AI의 발전은 막을 길이 없고 이것의 발전이 AI에 도태되는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평불만 없이 24시간 초고속 생산과 스스로 학습을 통한 공정개선 품질개선의 선두 AI를 만들어야만 나라의 부가 늘어나고 그 부로 잉여 인간들의 윤택한 삶을 지속유지 시켜야만 한다. 인간은 더 윤택한 삶은 포기할지라도 이전보다 열악한 삶은 견디지 못한다. 극 중 만수도 자신의 실직으로 인해 벌어지는 생활수준의 저하에 고통스러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가족들은 그런 변화가 불만이다.
그럼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AI경쟁력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되고 그 경쟁력이 현재의 현재의 부를 유지성장 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왜 정부가 그토록 AI 산업육성에 전념하는지는 결국 민생을 지키기 위함이다. 주인공이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과 같다. 하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이미 철 지난 제조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새로운 분야와 세계를 보지 못한다. 현재 로봇기술의 발전으로 머지않아 산업현장을 시작으로 범용로봇이 도입될 날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산업 현장의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아닌 기술의 적용과 도입을 막으려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이 시기를 늦출 수는 있을지 모른다. 시기가 늦어지면 기업은 위태롭다. 기업이 위태로우면 국가의 경쟁력이 위태롭다.
현재 AI가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음에도 그것에 무지한 노년들과도 같다. 아직 스마트폰도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AI는 언감생심이다. 그럼 노년의 사회 적응을 위해 AI를 쓰지 말자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결국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고 부양해야 할 대상들이다. 이제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은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그 넓은 제지 공장에 주인공 홀로 누비며 영화가 막을 내리는 장면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한 남편을 죽인 아내의 잔혹함은 어쩌면 변화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실직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 속을 맴도는 이유는 나 또한 실직을 경험했고 적지 않은 시간 경력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가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라간 연봉과 올라간 직급과 쌓아 놓은 경력들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극 중 주인공처럼 중년의 나이에 아내와 자녀 둘, 개 두 마리를 부양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면 그 미련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내가 주인공처럼 누구를 밟고 올라설 만큼의 담력과 잔인함이 없다면 어쩌면... 자살 공화국(독후감)의 명예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마도 우리는 감수성(공감)을 키우기보다 공격성(경쟁)을 먼저 배웠던 모양이다.
* 자살 관련 주제 토론 (선정도서 : 자기 앞의 생 - 에밀아자르)
https://youtube.com/shorts/tYmcSnYnZf0